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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해방투사


경제해방투사


경제해방투사(經濟解放鬪士, 영어: Economic Freedom Fighters)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산주의 정당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범아프리카주의, 흑인 민족주의, 좌익 대중주의 성향으로 묘사된다.

역사, 이념

경제해방투사는 여러 사회주의 이념을 포괄한 단체로 시작한 아프리카 민족회의 청년 동맹의 리더였던 줄리어스 말레마가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급진적이지 못한 사회민주주의 정책에 반발해 이탈하여 경제해방투사를 창당하였다. 경제해방투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최고 이념으로 삼고있으며, 당수 이름은 '최고 사령관'으로 당원과 당 간부들이 모두 붉은 베레모를 입는 등 군사조직과 비슷한 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별도의 군사조직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가난한 흑인 계층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백인 기득권 자본가들에 대한 엄벌을 주장하는데, 백인과 인도계에 대한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발언을 반복하여 우려를 낳고 있다. 줄리어스 말레마는 가두연설에서 "보어인을 쏘아죽여라" 라는 노래를 부르거나 로버트 무가베 사후 "믿을 수 있는 백인은 죽은 백인 뿐이다"라는 그의 말을 인용하는 등 노골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부정부패에 실망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겪지 않은 빈곤한 젊은 흑인들이 주로 지지하고 있으며 2014년 5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하원 400석 가운데 25석(득표 비율 6.35%)을 차지했다.

각주


Text submitted to CC-BY-SA license. Source: 경제해방투사 by Wikipedia (Historical)


EFF


EFF


EFF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경제해방투사(Economic Freedom Fighters)
  • 전자 프런티어 재단(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
  • 교육 텔레비전 방송(EDUCATION TELEVISION BROADCASTG)

Text submitted to CC-BY-SA license. Source: EFF by Wikipedia (Historical)


2019-2020년 홍콩 시위


2019-2020년 홍콩 시위


2019-2020년 홍콩 시위는 홍콩 정부의 2019년 도주범죄인 및 형사법 관련 법률 지원 개정 법안 도입으로 촉발된 일련의 시위이다. 현재 홍콩에는 인도법이 없으며, 해당 법안이 법률이 될 경우 수배된 범죄 용의자들과 범죄자들의 인도가 가능해지며 이 지역에는 중국 본토와 타이완이 포함된다. 홍콩 시민들은 이 법안이 중국 공산당의 강압적인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국양제와 시민들의 자유를 무시하고 사생활과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규모의 시위가 촉발되었다. 현재까지도 홍콩의 시위자들은 법안의 철회, 홍콩 경찰들의 잔혹성과 과잉진압에 대한 조사, 체포된 시위자들의 석방, 시위를 공식적으로 "폭동"이라고 규정한 것에 대한 철회, 그리고 홍콩의 행정장관 캐리 람의 사퇴와 홍콩 행정위원 및 행정장관의 선거의 보통선거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2019년 6월 9일, 홍콩정부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억지로 밀어붙였다. 시위자들은 6월 12일 법안의 제2차 낭독을 막기 위해 입법회 종합 빌딩 바깥에 모였고 이로 인해 경찰들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한편 경찰들은 최루탄과 고무탄을 시민들에게 발사했다. 법안이 정지된 지 하루 후인 6월 16일, 시위대는 법안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고 6월 12일 경찰의 과도한 무력 행사에 맞서기 위해 더 큰 시위를 열었다. 2019년 7월 1일 법안이 인계되면서 입법회 종합 빌딩 습격 사건이 발생하였고, 여름 내내 홍콩의 여러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2019년 7월 21일 시위자들과 통근자들을 공격한 위엔 롱 공격, 8월 31일 프린스에드워드역 습격 사건, 그리고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제70주년 기념행사 동안 대규모 시위 등이 발생하며 홍콩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캐리 람은 2019년 9월 4일 법안을 철회했지만, 시위대의 다른 4개의 요구는 거부했다. 캐리 람은 2019년 10월 4일 가면방지법을 시행하고자 긴급사태 규정 조례를 발동하였는데, 오히려 시민들의 반발을 사면서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한편 시위가 길어짐에 따라 양측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경찰들의 잔혹한 진압 및 과잉진압의 수가 증가했으며,. 몇몇 시위자들은 화염병을 던지거나, 선동가들에 맞서 자경단원으로 공격을 하거나, 친베이징파들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파괴행위를 가하는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정부의 탄압에 맞섰다. 홍콩 시위대와 시위 반대 세력의 활동가들이 서로를 공격함에 따라 홍콩 사회 내에 균열이 더욱 깊어졌으며, 중국 본토와 홍콩 현지 간의 감정의 골도 갈수록 벌어져가고만 있다. 게다가 2019년 11월에는 두 학생이 사망하고 비무장 시위대에게 총격이 가해지면서 시위는 더욱 고조되었다. 시위대의 대학교 캠퍼스 점령은 홍콩 정부의 포위로 끝이 났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홍콩 정부와 홍콩 경찰은 1997년 홍콩 반환 이래 국민 여론 조사에서 가장 낮은 지지율을 받았다. 홍콩 정부의 시위 대처 태도로 인해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친민주 진영이 승리를 거두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서는 시위를 1997년 홍콩 반환 이래 "홍콩에서의 최악의 위기"로 규정했고, 외국 세력이 분쟁에 개입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다만 중국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2020년에도 진행 중인 홍콩 시위는 지도 세력이 없으며, 외국과의 연계도 거의 없다고 보는 시각이 국제적으로 더 많다. 한편 2019년 11월 27일 미국은 홍콩 인권 및 민주주의 법안을 통과시켜 홍콩 시위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배경

2019년 2월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는 2018년 푼휘잉 피살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2019년 도주범죄인 및 형사법 관련 법률 지원 개정 법안을 제안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화민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중화민국에는 인도법이 없었고, 홍콩 정부는 도주범 법안과 형사법상 상호법률적 지원 법안을 개정하여 도주범을 홍콩 행정장관의 명령에 따라 처리하고자 했다.

개정 법안에 중국 본토가 포함된 것에 대해 홍콩 사회에서는 우려가 있었다. 친민주파들은 1997년부터 실행되어온 일국양제 원칙이 침해되고, 중국 공산당이 다스리는 중국 본토의 법안으로 인해 홍콩의 사법적 독립성이 사라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더해 홍콩 시민들은 과거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한 중국의 역사로 인해 중국의 사법체계와 인권 보호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법안의 반대 세력은 홍콩 정부에게 중화민국에만 해당 법안을 적용시킨다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고 용의자가 인도된 후에는 "일몰 조항"을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기타 원인

홍콩 시위는 2014년 우산 혁명 이후 4년 반 뒤에 발생한 시위였다. 우산 혁명은 2014년 홍콩 선거 개혁과 관련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홍콩에 대한 결정을 내린 이후 해당 결정이 자유를 제한한다고 판단되어 발발했다. 그러나 우산 혁명은 정부가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음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그 이후 홍콩의 민주화는 진전되지 않았다. 홍콩 입법회 중 직접적으로 선출된 의원은 절반에 불과했고, 나머지 절반은 선거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2017년 홍콩 민주운동가 구금으로 인해 홍콩의 정치적 개혁은 더욱 차질을 빚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홍콩의 사건들에 지나치고 두드러지게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홍콩 시민들은 홍콩 기본법에 따른 "고도의 자치"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특히 홍콩 입법회 맹세 사건은 6명의 법조가들이 자격을 박탈당하고 뒤이어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들의 통치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또한 커즈웨이 베이 북스 실종 사건은 중국 정부가 제재하는 용의자 인도와 비사법적 구금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홍콩의 기본법의 일부로 보통선거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2019년 홍콩의 민주화지수는 6.02/10으로, 비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었다.

2016년 NT 동부 선거에서 운동가 에드워드 륭의 선거 운동으로, 홍콩 지역파와 독립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홍콩에 사는 젊은이들이 점점 자신들을 중국인이 아니라고 인식하기 시작했고, 홍콩 대학교가 시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더 젊은 응답자일수록 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2019년 홍콩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자신들을 중국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2012년 덕육급국민교육 논란으로 홍콩의 젊은이들은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었다고 믿은 체제 자체에 대해 불신을 드러냈다. 홍콩 기본법이 만료되는 2047년이 다가옴에 따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홍콩의 젊은이들은 도주범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부 시위자들은 우산 혁명이 정치적 각성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평화로운 방법이 효율적이지 않다고 느낀 다른 시위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급진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언론들 역시 2014년 우산 혁명과 달리 2019년의 시위자들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느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시위의 목표 역시 법안을 철회하는 것에서 더 큰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홍콩 주민들의 분노를 촉발한 요인으로는 불안정한 집값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홍콩은 세계에서 집을 사기 가장 비싼 지역 중 하나이다. 홍콩은 도시 인구에 적합한 수준의 주택을 확보하지 못했다. 비즈니스 엘리트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홍콩은 경제적 불평등을 겪고 있다. 홍콩은 2017년 세계에서 지니 계수가 두 번째로 높았다. 특히 홍콩의 젊은이들은 사회 이동이 거의 없으며, 중국 본토와 직업적으로 경쟁을 해야 한다. 2018년 대학 졸업자들의 수입은 30년 전보다 훨씬 낮아졌다. 홍콩의 학자들이 2019년 6월 9일부터 8월 4일에 있었던 시위 기간 동안 6,600명의 사람들에게 수행한 설문지에 따르면, 시위자들의 60% 이상이 30세 이하였고, 시위자들의 75% 정도가 3차 교육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시위대의 요구

본디 시위대는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의 철회만을 요구사항으로 내걸었으나, 이후 당국의 탄압 조치와 중국의 억압적인 통제에 대한 반발로 요구 사항이 4개 더 추가되었다. 홍콩 시위대는 현재 이 5개의 요구 조항들을 완전히 정부로부터 인가받아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1.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의 완전한 철회
  2. 홍콩 시위대에 대한 폭도 지정 철회
  3. 홍콩 경찰의 시위대 무력진압에 대한 정식 사과 및 독립적 조사위원회 설치
  4. 체포된 시위대에 대한 전면 석방
  5.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및 홍콩 입법회 보통선거/평등선거 실시

역사

시위의 시작

홍콩 인도법 반대 시위는 2019년 3월 15일에 민주파 세력인 데모시스토 당이 홍콩 정부 건물 앞에서 첫 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50여 개의 민주파 성향의 정당들이 모여 결성한 민간인권전선(CHRF, Civil Human Rights Front)이 3월 31일에, 그리고 4월 28일에 또다시 인도법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다. 한편 입법원 내의 야당 의원들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인도법에 대하여 무기한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면서 시민들의 관심들을 끌어모았고, 시위가 갈수록 치열해짐에 따라 시민들의 관심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존 리 홍콩 보안국장은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안의 2차 독회를 2019년 6월에 실시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원래대로라면 법안을 심사해야하는 법률위원회 과정을 그냥 무시해버리는 작태를 취했다.

법안의 2차 독회가 현실화되자, 민간인권전선은 이에 맞서 6월 9일에 3차 시위를 벌였다. 홍콩 경찰 측에서는 이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약 27만 명 정도라고 주장하였으나, 주최 측에서는 약 10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번 시위에 참여했다고 주장하였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6월 12일에 국회에서 법안의 2차 독회를 밀어붙일 작정이었으나, 시민들이 홍콩 입법회 건물을 포위하면서까지 뜨겁게 맞서자 결국 국민의 뜻을 이기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들이 동원되어 최루탄, 고무탄 등을 시민들에게 사용하였으며, 기자들조차 임의로 체포하는 등의 강압적인 해산 작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스티븐 로 홍콩 경무청장은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경찰들의 만행을 옹호하였으나, 이미 허가된 집회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 과정과 시민들에게 감히 최루탄과 고무탄, 공포탄 등을 사용한 홍콩 경찰들의 행위는 국제적인 지탄을 받았다. 경찰들이 중립성을 잃고 시민들을 진압하기 시작하자, 시위대는 점차 경찰들의 폭력 행위에 대한 독립적 위원회 구성과 진상 조사, 사과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6월 15일에는 캐리 람 행정장관이 법안의 중지를 발표하였으나 완전히 철회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로 6월 12일에 35살 남성이 캐리 람의 결정과 경찰의 폭력에 반대하며 투신 자살하였으며, 다음 날 민간인권전선은 약 200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경찰 측에서는 33만 8천 명 정도가 참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입법회 점령

민간인권전선은 7월 1일에 벌인 가두행진 시위에 약 55만 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밝혔다. 다만 경찰 측에서는 약 19만 명 정도로 추산하였으며, 독립적인 조사기관에 의하면 약 26만 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한다. 이 시위는 상당히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지속되었으나, 밤이 되자 6월 이래 인도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자살에 분노한 몇몇 강경 시위대들이 모여 입법회 종합 건물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거의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2019년 7월 1일 이후 시위는 단순히 도심을 넘어 홍콩의 다른 권역까지 퍼져나갔다. 7월 7일에 가우룽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홍콩 경찰들이 영장을 소지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이 일었다. 7월 14일에는 샤텐에서도 평화 시위가 일어났으나, 경찰 측에서 시위자들과 일반 시민들 모두를 뉴타운플라자 건물에 밀어넣는 과정에서 시위가 과격해지고야 말았다.

민간인권전선은 7월 21일에 홍콩 섬에서 또다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이 지정한 시위 구역을 벗어났으며, 사이잉푼에 있는 홍콩 내 중화인민공화국 사무처로 들어가 국장을 떼내 버렸다. 한편 홍콩 섬에서 시위가 한참 벌어지고 있던 와중, 삼합회 일원들로 추정되는 백색 옷을 입은 남성들이 갑작스레 나타나 역 내에 있는 시민들, 그리고 시위대들을 무차별 폭행하였다. 당시 인근 경찰서는 비어있었고, 신고가 들어간 후에도 한참 후에야 현장에 경찰이 도착했다. 이로 인하여 경찰이 이 백색 옷을 입은 폭도들과 결탁했던 것이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친중 세력의 인사들 중 한 명이 이 백색 폭도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친중 세력과 정부가 이들의 만행을 묵과해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며 이같은 의심은 더더욱 증폭되었다. 이 공격은 홍콩 시위에서 꽤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데, 본디 시위에 중립적이거나 다소 회의적인 시민들까지 경찰의 억압과 불법 행위에 분노하여 시위에 참여하게 만들며 오히려 시위대의 규모를 훨씬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7월 27일에는 경찰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강행하였다. 이로 인해 경찰은 시위대에게 무자비한 진압을 가했고, 시위대와 경찰이 위엔룽 역 내에서 충돌하면서 폭력이 자행되었다. 다음날에도 시위대는 경찰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벌였으며, 시위로 인해 체포된 자들을 응원하기 위하여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경찰 차량에 의하여 폭죽으로 위협을 받기도 했다.

집단 파업

항의자들은 경찰의 가혹한 탄압과 진압 행위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8월 3일에는 훙홈의 크로스하버 터널을 봉쇄하기 위하여 집회를 벌이기도 하였고, 8월 5일에 예고된 집단 파업에는 대략 35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이 파업으로 약 200여 편에 달하는 항공편들이 중지되었다. 시위대는 약 홍콩의 7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고, 경찰 측에서는 이들을 강제로 해산하기 위하여 800여 개가 넘는 최루탄을 시민들에게 발포하였다. 특히 노스포인트에서 시위하던 시위 군중들은 나무 곤봉으로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하기도 하며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경찰들의 시위 탄압 조치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만 갔다. 8월 11일에는 경찰이 군중들에게 포대탄을 쏘면서 한 여성 시위자가 눈을 크게 다쳤고, 실내에서 함부로 최루탄을 발사하기도 하였으며, 사복경찰들을 대량으로 파견하는가 하면 매운 성분이 가득 들어있는 탄을 시민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쏘기도 했다. 이때문에 8월 12일에는 시위대들이 홍콩 국제공항에 모여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공항 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항공편을 취소시키거나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2명의 성인 남성을 사복 경찰로 착각하여 결박한 후 정체를 캐물은 일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평범한 관광객과 관영 글로벌 타임스 기자였다고 한다. 민간인권전선은 8월 18일에 빅토리아 공원에서 경찰의 잔혹성을 비판하며 집회를 열었고, 대략 17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참석했다고 증언했다.

8월 24일 이래로는 몇몇 급진 시위자들이 MRT 노선들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시위대가 허가받은 합법 시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 측에서 무단으로 역 일부를 폐쇄시켜버리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8월 25일에는 과격시위자들이 경찰에게 벽돌과 가솔린을 던지는 등 일부 과격한 행위를 하였고, 경찰 측에서는 최루탄과 함께 처음으로 물대포를 등장시키면서 이에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 경찰관이 공중으로 공포탄을 발포하면서, 시위 이래 처음으로 대중들을 상대로 총기 폭력을 할 수 있다는 흉악한 뜻을 드러냈다.

8월 31일에는 수 천명의 시위대들이 경찰의 인가를 받지 않은 채로 의원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의 체포를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날 밤, 특수부대가 프린스에드워드 역에 투입되었으며, 이들은 시민들을 구타한 뒤 후추 성분이 들어간 스프레이를 난사하였다. 시위대는 프린스에드워드 역에 설치되어 있던 CCTV를 공개하라고 요구하였으나, 경찰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의혹에도 경찰은 부정하였다.

송환법 철회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캐리 람 행정장관은 마침내 범죄인 송환법과 부가적인 조치들을 9월 4일에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5개의 요구 조항들을 모두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 시위대는 '영광이 다시 오길(Glory to Hong Kong)'이라는 민중가요를 제작하여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공항의 운영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또한 중국과 친화적인 기업들의 매점들이 입점하여 있는 쇼핑몰들에서 산발적인 시위들을 벌이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9월 15일에 벌어진 노스포인트의 대중 시위에서 푸젠성 출신의 중국 범죄자들이 시위대들을 조롱하면서 대대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한편 캐리 람 행정장관은 퀸 엘리자베스 스타디움에서 150여 명의 군중들과 처음으로 만났으나, 이들이 장관에게 민주주의 보장을 요구하면서 그녀를 포위했고, 장관은 약 4시간 정도 갇혀 있어야만 했다. 9월 29일에는 중국 공산당에 반대하는 집회가 경찰의 제지를 무릅쓰고 열렸고, 이후에도 약 40여 개의 해외 도시들에서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산발적 시위들이 함께 열렸다.

긴급조치 발동

201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 70주년의 국경일을 맞으면서 홍콩 시위는 날로 격화되어 갔다. 시위대의 반발이 심해지자 경찰 측에서는 마침내 처음으로 시위대를 상대로 실탄을 발사하였고, 이 실탄에 18세 소년이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을 시민들을 향해 1,400여 개에 달하는 최루탄을 발사하였으며, 하루에 269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체포하면서 6월 이래 최대 인원을 체포해 버렸다.

이와중에 캐리 람 행정장관은 '복면금지법', 즉 공공 집회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 조치를 발동하였고, 이를 통하여 10월 4일에 예정된 대규모 집회의 세를 강제로 탄압하려 들었다. 당연히 시위대는 격분하였고, 친중 기업의 매장들을 습격하거나 MRT들의 운행을 마비시키는 등의 다소 극단적인 방법들까지 동원하며 이 조치에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10월 내내 홍콩에서는 시위와 반대, 그리고 항의 표시가 도심 내에서 넘쳐났다.

존 리 경무청장도 행정장관에 이어 10월 23일에 공식적으로 송환법 철회를 공식화하였으나, 이미 중국 공산당의 탄압을 겪은 시위대가 이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충분치 않았고, 홍콩 정부에 대한 신뢰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대학 시위

11월 3일, 홍콩과기대에서 공부하던 22살의 대학생 차우츠폭이 시위 현장 부근의 주차장에서 추락하여 머리를 심하게 다치며 2차례의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8일에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의 죽음 이후 시위대는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여러 가지 플래시몹 시위를 벌였으며, 수많은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그의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을 경찰에게 돌렸으나, 경찰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그의 죽음에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차우츠폭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가 11월 11일에 대대적으로 기획되었다. 그들은 아침 출근길의 교통을 마비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이 21살의 비무장 상태의 대학생에게 실탄을 발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후에는 경찰 측에서 기업 사무실들이 밀접해있는 홍콩 도심 한가운데에서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였으며, 이때문에 기업들은 일찍 영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11월 14일에는 한 노인이 정부 지지자와 시위대 사이에서 발생한 충돌로 인하여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11월 11일에 경찰은 대학에 모여 시위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고무탄, 실탄, 최루탄을 난사하였으며, 대학생들은 이에 맞서 벽돌과 화염병 등을 수제로 제작하여 맞섰다. 홍콩 중문대학의 학생들은 거의 2일 동안이나 경찰들과 대치하였으며, 이후 대학 건물 내부로 들어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여러 수제 무기들을 제작하여 경찰의 폭압에 맞섰다. 시위대들이 이 과정에서 홍콩 폴리텍 대학과 크로스하버 터널을 점령한 이후에 경찰이 대대적으로 진압에 나서면서 대대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경찰은 얼마 있지 않아 부대를 투입하여 폴리텍 학에 강제로 진입하였으며, 대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체포하였다. 대학생들과 봉사자들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경찰의 살벌한 감시망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대부분이 붙잡히고 말았다.

한편 폴리텍 대학이 포위당하고 있던 와중, 외부의 시위대들은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안쪽의 대학생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해주려 시도하였으나, 경찰이 최루탄과 최루액을 흩뿌려대는 통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내부의 대학생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결국 경찰의 진압을 이기지 못하고 대다수가 체포당했다. 약 1,100여 명의 사람들이 경찰에게 붙잡혔으며, 포위전은 11월 29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민주파의 선거 승리

11월 24일에는 홍콩 구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과 홍콩 정부의 실책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거 투표소로 향하면서 매우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범민주파 진영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친중파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래 역대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선거에서 민주파 진영이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고, 경찰이 대대적인 탄압 조치를 펼치자 의회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온건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2019년 12월과 2020년 1월 동안에는 시위의 빈도와 강도도 점차 줄어들었다.

시위대는 12월 1일에 5개조의 요구문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은 이를 강경하게 최루탄 등으로 진압하였으며 1시간 내에 무조건 해산하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12월 8일에도 무려 8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쏟아져나와 정부에게 법과 민주 질서를 지킬 것을 압박하였고,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요구하였다. 이 8일에 일어난 시위는 민간인권전선이 조직한 것으로, 무려 4개월 만에 처음으로 민간인권전선이 주도한 합법적인 집회였다고 전해진다.

12월 중후반부에는 대규모의 시위는 차츰차츰 잦아들었고, 쇼핑몰 등에서의 깜짝 시위가 더 잦아졌다. 이러한 산발적 시위들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이어졌고, 경찰들은 이 시위들도 모두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2020년 1월 1일에는 민간인권전선이 주도한 새해 집회가 열렸고, 이 과정에서 정부에게 5개조 요구문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민간인권전선에 의하면 대략 103만 명 정도의 인파들이 신년 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또한 시위대들이 친중 의혹을 받은 HSBC 은행 사무실들을 습격하자, 경찰은 이에 최루탄 등으로 대응하였고 12월 동안 모인 집회의 기부금 약 9백만 달러를 강제로 압류하였다.

코로나 19

중국 우한에서 유래된 코로나 19가 전세계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키자, 자칫하면 집단전파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시위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홍콩의 민주 진영은 홍콩 정부에게 방역을 철저히 하라고 압박하는 방식으로 목적을 바꾸었고, 홍콩에 입국하는 모든 중국 본토인들을 금지하라고 요구하였다. 2020년 2월에는 병원 간호사와 의사들이 동일한 요구를 보이면서 집단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은 부분적으로는 성공적이었는데, 캐리 람 행정 장관이 본토의 입국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았으나 14개의 입국 사무처들 중에 3개만을 남기고 모두를 폐쇄했기 때문이다.

홍콩 정부는 도심 한가운데에 방역소나 보건소를 세우면서 전염병에 대응하고자 했는데, 거주 지역 가까이에 이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행진이나 도로 봉쇄 등으로 맞서며 홍콩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1월 말과 2월 초에는 여러 군데에서 폭발물이 발견되었으며 4개의 경찰서와 경찰차에 폭발물이 던져지고는 했다. 이같은 행위들은 정부의 부적절한 방역 정책과 위생 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행위로 평가받고 있다.

코로나 19가 팬데믹 사태를 일의며 2월과 3월에 세를 불려나가자, 시위는 갈수록 규모가 줄어들었다. 게다가 경찰은 코로나 19를 빌미로 삼아 모든 시위들을 불법화하거나 엄격히 처벌하였으며, 4월 18일에는 세를 틈타 지미 라이, 마틴 리 등 홍콩 민주계의 원로들을 체포하며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5월 12일에서는 홍콩 법원에서 21살의 청년에게 6월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무려 4년에 달하는 징역형을 내리며 처음으로 집회 참가자에게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홍콩 보안법

2020년 5월 21일에 마침내 중국 관영매체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외국의 간섭, 테러리즘, 불복종 등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들을 꺾을' 법안을 준비하여 홍콩 기본법에 추가시킨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하였다. 중국 베이징에서 곧바로 이 법안이 의결된다면, 더이상 홍콩현지에서는 이를 막을 수 없게 해버린 것이다. 해외 언론과 비평가들은 이번 조치가 중국이 지난 6월 이래 발표한 가장 강력한 탄압 조치로, 98년 이래 지속된 일국양제의 정신을 말살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이번 조치로 인하여 홍콩의 자유와 민주지수가 크게 하락하면서 장기적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역량이 크게 손상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특히 홍콩반환협정의 당사자인 영국은 이번 조치가 중국이 자신들에게 약속한 일국양제를 해친 것으로, 곧 영국과의 합의 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 호주, 캐나다 등과 함께 이번 조치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명하였다.

홍콩 보안법 발표는 코로나 19 이래 잠시 가라않아있었던 시위를 다시 촉발시켰다. 5월 24일에서 커즈웨이 만에서 열린 집회는 팬데믹 사태 이후 가장 규모가 컸으며, 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도 온라인으로 보안법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경찰은 여김없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들을 강제 진압하려 들었다. 5월 27일에는 최소 396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체포당했으며, 특히 이들 중 대부분은 심지어 시위를 시작하기도 전에 경찰이 심증으로 잡아버린 것이었다.

6월 30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마침내 홍콩보안법을 반-만장일치로 의결하였고, 법의 내용을 국민들에게 공개하지도 않은채로 통과시켜버렸다. 이 법안은 홍콩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는데, 데모시스토 당을 포함한 대다수의 민주운동 단체들은 이번 법의 탄압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하며 홍콩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고 밝혔고, 7월 1일에는 수 천명의 시민들이 모여 홍콩 보안법을 규탄하였다. 그 날에도 경찰은 10여 명의 시위자들을 강제로 잡아들였다.

탄압

2019년 구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것에 대하여 고무된 민주파 진영은 2020년 9월에 열리도록 예정된 홍콩 입법원 선거에서도 무난히 70석을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이때문에 급진 민주파 인사들은 심지어 헌법에 명시된 모든 의회의 권리들을 이용하여 행정부를 압박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다니기 시작했고, 5개조의 요구문들을 모두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범민주 진영은 처음으로 선거에 후보를 내기 위하여 예비선거를 실시했고, 이 선거에 무려 6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참여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예비선거에서는 전통적인 인사들이 대거 낙선하고 더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그러나 홍콩 주재의 중국 사무처 측에서는 이 예비선거거 홍콩 기본법과 홍콩 보안법에 반하는 것이며, 중앙 권력에 도전하려는 무모한 시도라고 낙인찍으면서 예비선거를 불법으로 규정, 추후의 선거 절차를 모두 무효화해버렸다.

그해 7월 30일, 홍콩 정부는 12명에 달하는 범민주파 진영의 후보들의 자격을 박탈하였고, 그나마 온건하다고 여겨졌던 몇몇 인사들의 후보 자격들도 모두 박탈해버렸다. 홍콩 정부는 이 결정으로 인하여 헌법에 명시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무시하였다는 국제사회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다음 날에 캐리 람 행정장관은 여론을 그대로 무시하며 입법원 선거를 2021년 9월까지 미루어버렸으며, 민주진영에서는 이를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7월에는 홍콩 언론들이 민주화 운동가인 토니 청과 16세에서 21세 사이의 학생들 몇몇을 '미국으로 이민'가려 했다는 혐의로 홍콩보안법을 어긴 죄로 체포되었다. 이는 보안법 제정 이래 처음으로 보안법 위반죄로 체포된 것이었다. 7월 30일에는 홍콩 경찰이 도피하고 있는 6명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으며, 이 6명들 사이에서는 전 의원 나탄 로, 전 홍콩주재 영국 영사관 직원 사이먼 청, 민주운동가 레이 웡, 미국 운동가 사무엘 추 등이 있었다. 특히 미국 국적의 사무엘 추를 상대로 홍콩이 영장을 발부한 것은, 홍콩 정부가 처음으로 치외법권을 사용한 사례였다. 8월 10일에는 지미 라이와 아그네스 초우 등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들이 붙잡혔고, 같은 날에 지미 라이가 소유하고 있던 언론사인 '애플 데일리(Apple Daily)'도 강제로 압수수색당했다.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주화 진영이 날로 약화되자, 정부 측에서는 세를 몰아 홍콩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갈수록 단단히 했다. 홍콩 정부는 교과서에서 천안문 사건에 대한 언급을 모두 빼버렸으며, 민주적인 교사들을 업무에서 강제로 배제하였고 이전의 사법부의 판결을 무시하고 아예 애초부터 홍콩에는 권력분립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못박았다. 2020년 8월에는 시위대를 상대로 차를 몰고 돌진한 혐의로 기소된 한 남성과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사하여 심각한 중상을 입힌 경찰관의 사건을 사법부가 각하시켜버렸고, 반대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체포 영장을 남발하기 시작하였다.

홍콩 현지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갈수록 탄압받자 12명의 홍콩 운동가들이 8월 23일에 보트를 타고 중화민국으로 도피하다가 해안경비대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함부로 월경하려 한 죄로 구속되었고, 변호사나 가족을 접견하는 것마저 제한되었다. 2020년 10월 27일에는 마침내 미국인 사무엘 추를 미국 영사관 바깥에서 체포해버렸다고 전해진다. 11월 23일에는 대표적인 민주활동가인 조슈아 웡과 아그네스 초우, 이반 람 등에게 불법 집회를 한 죄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같이 보기

  •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
  • 흑양자형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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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submitted to CC-BY-SA license. Source: 2019-2020년 홍콩 시위 by Wikipedia (Historical)


페트로 포로셴코


페트로 포로셴코


페트로 올렉시요비치 포로셴코(우크라이나어: Петро Олексійович Порошенко, IPA: pronounced [peˈtrɔ olekˈs⁽ʲ⁾ijowɪtʃ poroˈʃɛnko], 문화어: 뾰뜨르 뽀로쉔꼬, 1965년 9월 26일~)는 우크라이나의 사업가이자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우크라이나의 제5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포로셴코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외무부 장관직을, 2012년에는 우크라이나 경제개발 및 통상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는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총재직에 있었다. 포로셴코는 201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54.7%의 득표율로 결선투표 없이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포로셴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분리주의 반군을 돈바스 지역 깊숙히 밀어붙였다. 또한 유럽 연합-우크라이나 연합 협정에 서명하여 우크라이나의 유럽 연합 가입을 진행하였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국내 정책으로 우크라이나어 사용 확대,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 포괄적 자본주의, 탈공산화, 지방 분권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2018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하의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모스크바로부터 독립시켜 독립 교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포로셴코의 대통령 재임 시기는 지지자나 반대파나 "군, 언어, 신앙"(우크라이나어: armiia, mova, vira 아르미아, 모바, 비라[*]) 3개 단어로 요약된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연임 후보였던 포로셴코는 결선투표에서 24.5%를 득표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포로셴코가 대선에서 왜 패배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의 정립된 이유가 없고 다양한 의견과 그 요소들이 존재한다. 패배 가설에는 포로셴코 반대파 확대론, 민족주의 격화론, 부패 해결 실패에 대한 실망, 포로셴코가 안드리 사도비나 조지아의 전 대통령 미헤일 사카슈빌리 (나중에 우크라이나에서 추방됨)와 같은 타 친서방계 정치인과 겪고 있는 심각한 갈등에 대한 불만, 친러계 정치인 빅토르 메드베드추크의 부상에 자유유럽방송과 반부패 운동가 데니스 비후스가 제기한 포로셴코와 메드베드추크의 비밀스런 야합에 대한 비난 등 매우 다양하다.

포로셴코는 2022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의회에 해당하는 최고 라다의 현역 국회의원이자 정당 유럽연대의 당수이다. 정계 외적으로는 수많은 자산과 부동산을 취득한 우크라이나의 유명 올리가르히이다. 포로셴코가 소유한 가장 인지도 높은 기업으로는 포로셴코에게 "초콜릿 왕"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한 대형 제과기업 로셴과 2021년 11월까지 포로셴코가 소유하고 있었던 TV 뉴스 채널인 5 카날이다. 포로셴코는 제조업, 농업, 금융업 등 우크라이나 내 다양한 산업을 소유하고 있으며 대통령 재임 이전에도 정부 고위직으로 여러 차례 역임하여 정치적으로도 여러 영향을 주었고,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영향력이 깊은 방송국과 같은 매스 미디어 소유자로 우크라이나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린 시절과 학업

페트로 포로셴코의 아버지인 올렉시 포로셴코(1936-2020)는 엔지니어로 우크라이나 SSR에서 여러 공장을 관리하다 정부 관료로도 올라섰다. 포로셴코의 어머니인 에우헤니야 세르헤에우나 흐리호르추크(우크라이나어: Евгения Сергеевна Григорчук, 1937-2004)는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크라이나 신문에 따르면 회계사였으며 회계직업기술학교의 교사였다고 한다. 두 부모 사이에서 페트로 포로셴코는 1965년 9월 26일 오데사주의 볼흐라드 시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인 올렉시 포로셴코가 지휘하는 기계 제조 공장이 있었던 티기나(현재의 벤데르, 당시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도시로 현재 사실상 미승인 독립국인 트란스니스트리아 내에 있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루마니아어를 배웠다.

포로셴코는 어린 시절 유도와 삼보를 연습하여 소련 스포츠 대표 후보생(러시아어: кандидат в мастера спорта СССР)이기도 했다. 스포츠 성적은 좋았지만 졸업식에서 정상적인 금메달을 받지 못했으며 성적표에서는 태도 부문에서 "C" 등급의 성적을 맞기도 하였다. 군사 위원회에서 소련 육군생도 4명과 싸운 포로셴코는 1984년에서 1986년까지 우크라이나와 멀리 떨어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소련군에 배치되었다.

포로셴코는 1989년 키이우 대학교의 국제관계 및 법학부 (뒤이어 국제관계학회)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키이우 대학교에서 나중에 조지아의 전 대통령이자 2015년 5월 오데사주의 주지사로 임명된 미헤일 사카슈빌리와 친분을 쌓게 된다.

1984년 포로셴코는 당시 의대생이었던 마리나 페레베덴체바와 결혼했다. 1985년에는 장남 올렉시이 포로셴코가 태어났다(나머지 둘은 각각 2000년, 2001년에 태어났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포로셴코는 키이우 대학의 국제무역학과의 조교로 근무했다. 학창 시절에는 해외 무역계약협상을 중개하는 법률자문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가 나중에는 직접 협상가로 활동하여 1991년 소련의 초콜릿 산업계에 코코아콩을 공급하는 무역업을 하였다. 동시에 공화국 상공회의소의 부국장이자 "우크라이나 환전소"의 CEO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페트로 포로셴코의 8살 위 형인 미하일로 포로셴코는 1997년 원인 미상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사업 활동

1993년 포로셴코는 아버지 올렉시이와 키이우의 도로교통연구소 내 동료들과 함께 제과 및 자동차 산업(나중에는 기타 농업가공업도 포괄) 부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우크르프로민베스트(우크라이나어: Група «Укрпромінвест») 산업투자회사를 설립하였다. 창업 이후 1998년까지 회사의 최고이사로 활동하였고, 1998년 의회에 입성하면서 아버지에게 직함을 물려주었고 페트로 포로셴코 본인은 명예회장 직위에 올랐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우크로프로민베스트는 여러 국영 제과 기업을 인수, 합병하여 1996년 생긴 로셴 그룹에 투자하여 지배권을 얻으며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과제 제조 공장도 건설하였다. 포로셴코는 제과 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여 성공하면서 일명 "초콜릿 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포로셴코는 제과 외에도 몇몇 자동차 및 버스 제조 회사, 쿠즈냐 나 리발스코무 조선소, 5 카날 방송국 등 우크라이나의 여러 산업체를 인수하였다.

포로셴코와 로스차일드 & Co(로스차일드 자산관리신탁)은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된 이후 직접 사업경영하는 것을 포기하고 2016년 1월부터 사업체들을 백지신탁했다고 밝혔다.

2020년 1월에는 페트로 포로셴코가 우크르프로민베스트-아그로 농업기업 같은 남아 있는 사업 몇 개를 장남인 올렉시 포로셴코에게 양도하였다고 발표했다.

2021년 2월에는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의 정보, 뉴스 채널인 프랴미 카날을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억만장자 순위 등극

2012년 3월 포브스는 2012년 세계 억만장자 목록에 포로셴코를 미화 10억달러 자산을 가졌다며 1,153위로 포함시켰다. 2015년 5월 기준 포로셴코는 블룸버그 뉴스 기준 약 7억 2천만 달러로 러시아의 로셴 제품 수입 금지 조치와 우크라이나 경제 상황 악화로 재산의 약 25%를 잃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내 최고 억만장자 순위에서 2015년 10월 우크라이나 저널인 노보예 브레먀가 우크라이나 내에서 손꼽히는 투자회사인 드래곤 캐피탈과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 기준 포로셴코 대통령은 상위 10위 안에 든 억만장자 중 유일하게 자산가치가 전년 대비 상승한 인물로 파악되었다. 포로셴코의 자산 추정치는 20% 늘어난 약 9억 7,900만 달러로 우크라이나의 억만장자 순위는 9위에서 6위로 3계단 올랐다. 같은 기사에서는 포로셴코가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초대형 규모의 기업을 소유한 유럽 지도자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포로셴코가 소유한 기업은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두고 있고 키프로스에 등록되어 있는 회사에 총 4억 5천만 유로가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실질 법인세율 18%와 비교해 단 5%의 법인세만 납부하고 있다. 네덜란드 상공회의소가 발간한 연간 결산에서는 장부상 자산만 적혀 있기 때문에 실질 시장가치는 이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포로셴코는 대통령 당선 이후 순자산이 40% 감소한 약 7억 5,500만 달러로 기록되면서 억만장자 지위를 상실하였다.

포로셴코와 관련된 기업 목록

아래 목록의 기업 중 일부는 포로셴코가 사장이었던 우크르프로민베스트사의 자회사였다. 이 투자 그룹은 2012년 4월 해체되었다. 이후 포로셴코는 대통령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기업 지분을 백지신탁으로 넘겼다고 말했다.

  • 보그단 그룹 (2009년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생산라인이 붕괴되어 지분 매각)
  • 로셴 그룹
  • 5 카날 및 프랴미 카날 텔레비전 채널 (2019년 이후 프랴미 카날 텔레비전 방송국 지분이 없다 주장)
  • 쿠즈냐 나 리발스코무 조선소
  • 이호르 코노넨코와 함께 신탁으로 소유중인 국제투자은행
  • 우크르프로민베스트-아그로 (농업 기업)
    • 조리아 포딜리아 (사탕무 생산 및 수확 전문)
    • 포딜리아
    • 마스-아그로
    • 아흐로피르마 "드니프로아흐롤란"
    • 아흐로피르마 "이반키우치"
  • 세바스토폴 조선소 (2015년 크림반도를 점령한 러시아 정부의 기업 압류로 상실)

정치 활동

정계 입문

포로셴코는 1998년 우크라이나 제12선거구(빈니차 제2선거구) 1인구에서 17.44%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최고 라다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포로셴코는 처음에 빅토르 메드베드추크가 당수로 당시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을 지지했던 우크라이나 연합사회민주당(SPDU) 당원으로 소속해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사회민주당을 탈당하여 독립적인 좌익-중도 계열 원내교섭단체이자 이후 정당이 된 교섭단체 우크라이나의 연대당을 창당하였다. 2001년 포로셴코는 쿠치마 대통령을 지지하는 지역당을 창당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000년 말 우크라이나 연대당이 지역당과 합병되었고 포로셴코는 비슷한 이름의 신당 플랫폼인 "연대"를 창당하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2001년 포로셴코는 쿠치마 지지자들과 결별해 빅토르 유셴코의 우리 우크라이나-인민 자위 블록 야당 진영의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2002년 3월 열린 총선에서 우리 우크라이나 블록이 제1당이 되었고 포로셴코 또한 의원 당선에 성공하자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예결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당시 4,700만 흐리브냐 예산을 잘못 선정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포로셴코가 우리 우크라이나 당에 합류하자 당시 국세청의 세무조사관들은 포로셴코의 사업 조사를 벌이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로셴코의 우크르프로민베스트는 2005년 유셴코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유셴코는 포로셴코 딸의 대부로 있을 정도로 포로셴코는 유셴코의 매우 밀접한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었다. 포로셴코는 유센코 지지자 중 가장 부유한 올리가르히였으며 종종 우리 우크라이나 블록과 오렌지 혁명 당시 주요 재정적 후원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셴코가 승리한 후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국가안전보장회의 장관에 임명되었다.

2005년 9월에는 포로셴코와 당시 총리 율리야 티모셴코 사이에 국영기업 민영화와 관련된 상호 부패 의혹이 불거졌다. 예를 들어 포로셴코는 당시 10억 달러 가치로 평가되었던 국영기업인 니코폴 합금철 회사를 올리가르히인 빅토르 핀추크에게 8천만 달러에 인수하게 허가해줬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부패 혐의가 불거지자 유셴코 대통령은 포로셴코와 티모셴코를 포함한 부패 혐의 각료들을 해임하였다. 또한 유셴코가 당시 우크라이나의 검찰총장인 스뱌토슬라우 피스쿤을 해임한 직후 우크라이나 검찰은 포로셴코에 대한 권력 남용 혐의 수사를 종결하였다. 피스쿤은 당시 티모셴코에 대한 형사 소송 진행을 거부하고 포로셴코에 대한 형사 소송 취하를 거부하여 해임당했다고 주장했다.

2006년 3월 열린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포로셴코는 우리 우크라이나 블록의 지지를 받아 비례투표에서 의회 재선에 성공하였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의회 경제금융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포로셴코는 최고 라다 의장(의회 의장)을 자처했는데, 우크라이나 사회당은 당시 당수 올렉산드르 모로즈가 연정시 의장으로 선출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우크라이나 지역당의 국민단결동맹에 합류해버리면서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포로셴코의 우리 우크라이나와 동맹당인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은 연정에서 제외되었다.

포로셴코는 2007년 열린 조기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2007년 2월부터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위원회 총재를 맡았다. 포로셴코는 1999년부터 2012년까지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의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외무부 장관과 통상부 장관 시절

2009년 10월 7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유셴코는 포로셴코를 외무부 장관에 지명하였다. 2009년 10월 9일에는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가 외무부 장관 임명 결의를 승인하였다. 2009년 10월 12일에는 유셴코 대통령이 포로셴코를 다시 국가안정보장회의 위원직에 임명하였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포로셴코는 나토 회원국 가입 자체가 국가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도 말했다. 2010년 3월 11일에는 포로셴코가 외무장관 직에서 해임되었지만,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포로셴코와 더욱 협력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2012년 2월 말에는 포로셴코가 아자로우 내각에서 새롭게 창설된 우크라이나 경제개발통상부 장관직이 될 것이라고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2012년 3월 9일 대통령 야누코비치는 포로셴코가 경제개발통상부 장관으로 임명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3월 23일에는 포로셴코가 야누코비치에게 경제개발통상부 장관(일명 통상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달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를 유럽 연합과 더욱 친밀해지고 티모셴코를 감옥에서 석방시키기 위해 통상부 장관직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포로셴코가 통상부 장관이 된 이후 우크라이나 국세청은 포로셴코의 여러 사업체를 강하게 압박하기도 하였다.

의원으로 복귀

2012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포로셴코는 빈니차주에 있는 빈니차 제12선거구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70%가 넘는 압도적 득표율로 의원에 당선하였다. 포로셴코는 어느 원내교섭단체에도 합류하지 않았으며, 유럽 통합 문제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포로셴코의 아버지인 올렉시이 포로셴코도 빈니차주 제16선거구에 출마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2013년 2월 중순에는 포로셴코가 2014년 키이우 시장 선거에서 키이우 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말했다가 비탈리 클리츠코 후보를 지지한다며 사퇴하였다. 2013년 3월 여론조사 기준 키이우 시장 선거 후보 지지율은 클리츠코 31%, 올렉산드르 포포우 20.3%, 포로셴코 7%였다.

2013년에는 포로셴코의 연대당이 10년간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당등록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이후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애국과 자유를 위한 국민동맹 "공세"(NASTUP, 우크라이나어: «Національний альянс свободи та українського патріотизму»)를 발족하여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 단체는 이후 전우크라이나 연합 "연대"로 개명하였다.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포로셴코는 2013년 1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진행되었던 유로마이단 시위에서 재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포로셴코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특히 2013년 12월 1일 일어난 유로마이단 시위대 봉기 당시 포로셴코와 아들 포로셴코가 시위대 현장으로 나가 경찰과 보안군의 공격으로부터 평화 시위대를 보호해야 한다고 나가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10.3%로 크게 상승했다. 하지만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유로마이단 시위에 참여했던 야당인 바트키우시나, 스보보다, 우크라이나 민주동맹(UDAR) 사이 협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워싱턴 포스트의 랠리 웨이머스와의 인터뷰에서 포로셴코는 "저는 시작때부터 마이단(시위)의 중심 조직자였습니다. 제 텔레비전 채널인 "5 카날 TV"(채널 5)는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중략) 그 때 채널 5가 방송을 시작했는데 당시 마이단에는 시위대가 2천명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밤 사이 사람들은 7, 8, 9, 10 km를 걸어가며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시간 동안 거의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죠."라고 말했다. BBC에서는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인기있는 뉴스 채널인 5 카날 TV를 소유하고 있는데 키이우에서 일어난 수 개월간 일어난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반정부 세력을 적극 옹호했다"라고 말했다.

포로셴코는 아르세니 야체뉴크 총리의 야체뉴크 내각 합류에 거부하였고 또한 혁명 이후 새롭게 수립된 2개의 의회 원내교섭단체인 부흥(르네상스, 우크라이나어: Відродження)과 주권 유럽 우크라이나 양쪽 모두에 합류하지 않았다.

2014년 2월에는 크림 위기 당시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가 위기 해결을 위해 포로셴코에게 위기 해결권을 위임하여 크림반도로 출장을 다녀갔다 왔다.. 2014년 4월 24일 포로셴코는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지 않은 루한스크를 방문하였다. 이전에서 크림반도와 마찬가지로 루한스크 공항에서 수백명의 친러계 주민들이 봉쇄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포로셴코는 나중에 "내가 루한스크주를 여행했을 때 내 차가 총에 맞고 우리 일행 전부를 인질로 잡으러고 시도했다"라고 말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대선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면서 2014년 5월 25일 새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었다. 선거 이전인 2014년 3월 SOCIS에서 열린 여론조사에서 포로셴코는 40%의 지지율로 다른 모든 후보를 제치고 압도적인 1위 후보로 올라섰다. 2-3월 이루어진 포로셴코와 클리츠코 간의 단일화 협상이 종결되어 3월 29일 포로셴코는 공식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하였고, 같은 날 비탈리 클리츠코는 키이우 시장 선거에 나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며, 대통령 선거엔 포로셴코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발표했다.

4월 2일 포로센코는 "만약 내가 당선된다면, 난 정직하게 로셴 관련해서 전부 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4월 초에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여론이 지지도가 낮다며 "나라를 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 굳이 주요 의제에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또한 5 카날 텔레비전 채널은 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 14일 포로셴코는 그해 시행할 유럽의회 선거에서 옆 나라인 폴란드에 있는 야로스와프 고빈의 폴란드 다함께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고빈의 당 동지인 파베우 코발 의원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포로셴코의 대통령 선거 슬로건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자! - 포로셴코"(우크라이나어: Жити по-новому)이다.

5월 29일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포로셴코가 54.7%의 득표율로 5월 25일 대통령 1차선거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5월 초 포로셴코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당시 돈바스의 친러 분리주의자들은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테러리스트를 거리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5월 11일 열리기로 계획된 2014년 돈바스 지위 국민투표에 대해 "가짜 조작투표"라고 말했다.

대통령직 시기

2014년 5월 25일 대통령 선거 당일 저녁, 포로셴코는 "첫 대통령직 순방은 돈바스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당시 돈바스 지역은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군사작전을 계속하여 무장반란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선포하며 "대테러리스트 작전은 두세달 동안 지속할 수도 없고 그렇게 지속해서도 안된다. 최대한 빨리 끝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포로셴코는 무장 반군을 소말리아의 해적에 비유했다. 또한 국제적인 중재자들이 마련된 가운데 러시아와 협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양자 관계 문제로 타국 중재세력은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대통령 당선인으로 포로셴코는 2014년 3월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반도를 반환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2014년 내에 새 총선거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취임식

포로셴코는 2014년 6월 4일 최고 라다 건물 안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취임사에서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가 절대로 크림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크라이나의 통합을 강조하였다. 또한 2014년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분쟁에 가담한 친러계 분리주의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에 대해 "피를 묻히지 않았다면 전부 사면"하겠다고 말했으나, "조폭이나 살인범과 대화하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포로셴코는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조기 지방선거를 주장하였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유럽 연합 제휴 협정의 경제 관련 부문에 서명할 것이며, 우크라이나의 유럽 연합 정식 가입을 위한 첫 단계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어가 유일한 공용어"라고 말했지만 뒤이어 "러시아어와 기타 다른 모든 언어도 발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설 일부는 러시아어로 말하기도 했다.

이날 취임식에서는 미국의 부통령 조 바이든, 폴란드의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벨라루스의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리투아니아의 대통령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스위스의 대통령이자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의장인 디디에 부르칼테르, 독일의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 조지아의 대통령 기오르기 마르그벨라슈빌리, 캐나다의 총리 스티븐 하퍼, 헝가리의 총리 오르반 빅토르, 유럽 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헤르만 반 롬푀이, OSCE 사무총장 람베르토 찬니에르, 유엔 정치평화건설사무부 사무총장 제퍼리 D. 펠트만, 중화인민공화국 문화관광부장 차이우, 주우크라이나 러시아 대사 미하일 주라보프 등 50개국 해외 정상 및 대표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전 총리인 율리야 티모셴코도 참석했다. 취임식 이후 티모셴코는 포로셴코에 대해 "우크라이나에 가장 안정적인 요소를 더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국내 정책

동우크라이나 평화 계획

포로셴코의 취임 당시 우크라이나의 친러 반정부 무장세력은 자체적인 주민투표를 열고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돈바스의 대부분을 장악하였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독립 시도를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취임식 이후 포로셴코는 러시아로부터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정받기 위해 "평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는데 이 계획은 (포로셴코가 '테러리스트'라고 이름붙인) 분리주의자와의 휴전과 민간인을 위한 인도주의적 회랑 설립 2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로셴코는 첫 평화 계획이 무산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플랜 B"로 옮길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2014년 6월 20일 돈바스를 처음 방문한 포로셴코는 현지 시각 기준 당일 18시 30분부터 6월 27일까지 휴전을 선언하였다. 포로셴코는 이 휴전은 "테러리스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해받지 않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돈바스 방문 당시 포로셴코는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의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할 계획을 제시하며 돈바스의 지방분권화와 조기선거를 내세웠다. 휴전 기간 동안 포로셴코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노르망디 포맷 전화 통화를 했다. 6월 27일 EU와의 연합 협정 서명일에는 휴전 협정 시간을 72시간 연장 발표하였다.

일방적 휴전 선언이 만료된 6월 30일 현지 시각 22시, 포로셴코는 "우리는 우리 영토로 진격해 해방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7월 27일까지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의 60개 이상 마을과 도시를 수복하였다. 하지만 8월 27일부터 러시아 정규군이 우크라이나 내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후퇴하였고 결국 9월 7일 휴전 협정인 민스크 협정을 체결하지만 이후에도 돈바스 지역의 무력 충돌을 계속되었다.

2015년 2월 12일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포로셴코, 푸틴, 메르켈, 올랑드 4명이 만나 민스크 협정을 준수하기 위한 추가 협정인 민스크 II 협정에 서명하였다. 같은 해 10월 2일 노르망디 포맷 회의에서 100 mm 구경 이하의 경무기와 전차, 박격포를 철수하기로 발표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을 포함한 모든 돈바스 점령 지대에 휴전 협정 준수 감시를 위해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감시단이 투입되었다. 10월 8일에는 포로셴코가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 연방군이 완전히 철수해야 휴접 협정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가 요구하던, 민스크 협정의 정치적 조항을 이행하기 전 모든 안보 관련 요구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는 해석 준칙을 받아들었다. 2017년 5월 푸틴 대통령과 있었던 회담에서 독일의 총리 메르켈은 직접적으로 크렘린의 지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끝내라고 요구하였다. 메르켈은 돈바스의 정치 문제가 현재 진행중인 교전 상황이 끝나야지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파리에서 열린 포로셴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러시아가 돈바스를 침공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마크롱은 "우리도 크림반도 침공이 불법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 전부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2018년 1월 28일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는 포로셴코가 발의했던 돈바스의 재통합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하였다. 이 법안은 러시아를 공식적으로 침략국으로 인정하며,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임의로 점령한 것으로 간주한다. 1월 22일 우크라이나 통일의 날 연설에서 포로셴코는 돈바스 재통합법이 민스크 협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침략자는 자기가 침략자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둑이면서 자신이 저리는 범죄의 국제적인 책임을 피하러 한다."라고 말했다. 2월 20일에는 포로셴코가 돈바스 재통합법에 서명하였다.

2018년 3월 27일 독일의 신문 베스트도이체 차이퉁(WZ)와의 인터뷰에서 포로셴코는 동우크라이나가 "얼어붙은 냉전이 아닌 열전 상태"라고 말하면서 위성 사진을 가지고 우크라이나 내에 포병 1,000문 이상, 미사일 발사 차량 300대 이상, 러시아 전차 700대 이상이 사용되었다고 밝히고 "러시아의 무장 세력이 우크라이나에서 작전을 지속하는 한 민스크 협정이 이뤄질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포로셴코는 돈바스에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민스크 협정 이행의 관건이라고 말하면서 반러시아 경제 제재는 무장 상태를 무력화하고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에서 모든 러시아군이 철수해야 해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8년 4월 30일, 포로셴코는 돈바스 지역에서 4년간의 대테러리스트 작전이 종료되었고 이제 합동군사작전(OOS)로 넘어간다고 선언하였다. 포로셴코는 돈바스 지역의 작전이 모든 우크라이나 마을과 도시가 러시아 점령군으로부터 '해방'되야지만 끝내겠다고 말했다.

2018년 5월 19일, 포로셴코는 독립국가연합(CIS)의 우크라이나 옵서버 참여 자격을 최종적으로 정지한다는 국가안전보장위원회 결정을 시행하는 법령에 서명하며 공식적으로 독립국가연합 준회원국에서 탈퇴했다.

2018년 8월 28일에는 포로셴코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우애, 협력 및 동반자 관계 조약의 효력을 정지하겠다고 밝혔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외무부에게 효력 정지를 위해 필요한 문서 작업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9월 3일에는 친선 조약을 폐기하는 것이 복잡하고 긴 절차를 걸쳐야 해 굳이 폐기하기 않고 갱신만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9월 6일 국가안전보장위원회는 러시아와의 우호조약을 향후 10년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9월 17일에는 포로셴코 대통령이 조약 갱신 정지 법안에 서명하였다.

권력 분권 정책

6월 중순 포로셴코는 우크라니아 행정부의 분권화를 달성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헌법 개정 절차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2014년 6월 16일 포로셴코는 헌법 개정이 "평화 계획의 키포인트"라고 말했다. 2014년 6월 헌법 개정안 초안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행정 구역을 지역(현재의 주를 대체), 지구, 호르마다(단일 지역공동체)로 개편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개정안에서 포로센코는 "마을, 시, 지구, 지역 행정은 법에 명시된 절차에 따라 자신의 행정 구역 단위 내에서 러시아어 및 기타 소수언어의 지위를 어떻게 명시할 지 결정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역의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 하나라고도 말했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각 주나 현(라이온) 및 구가 우크라이나의 헌법과 법률을 제대로 준수하고 인권과 자유를 제대로 보장하고 있는지 감사하는 대통령 직속 보직을 신설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비상사태가 발령되거나 계엄령 체제 하인 경우" 감사 중인 지역 행정을 "지도하고 조직"하는 역할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체뉴크 내각의 주요 연정 파트너인 바트키우시나(조국당)는 이 계획에 대해 검토가 면밀히 필요하다고 즉각 통과에 반대하였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연방화에 반대한다. 또한 대통령 권한에 대한 강황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2015년 7월 1일 지방분권 관련 법안 초안에서 각 지역자치단체는 자기 지역마다 세수가 어떻게 지출되는지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또한 초안에서 돈바스 지역은 친러 반군의 요구대로 완전한 자치권을 주지 않고 3년간 부분적인 자치권을 가지는 내용으로 제정되었다.

의회 해산

2014년 8월 25일 포로셴코는 같은 해 10월 26일에 최고 라다(우크라이나의 의회) 조기선거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포로셴코는 조기선거는 "(전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주축을 이루었던 라다를 정화시키기 위해" 여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로셴코는 현 의원들을 "명백히 선출한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라다 의원들이 "2014년 1월 사망한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우크라이나 시위금지법"의 제정에 책임이 있다고도 말했다. 포로셴코는 현 의원 중 많은 수가 "군사를 동원한 분리주의자의 직접적인 후원자, 공범 혹은 최소 동조자"라고 말했다.

포로셴코가 2014년 5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의회 총선거 시행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7월 24일 조기선거를 위해 의회 연립여당 원내교섭단체인 유럽의 선택을 해체하여 의회 내 다수당을 없애 조기선거 조건을 만족시켰다. 8월 25일 저녁 포로셴코 대통령은 최고 라다를 해산하고 2014년 10월 26일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2014년 8월 27일 전우크라이나 평화통일당 당대표회에서 정당명을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BPP)라는 새 명칭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은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연대""로 다시 개명하였다.

10월 24일 총선 결과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은 21.81%의 득표율을 기록하였고 총 132명의 의원이 당선되어 원내 1당이 되었다.

정화 운동

2014년 10월 9일, 포로셴코는 9월 16일 최고 라다에서 통과되었던 정화 운동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였다. 서명한 법은 야누코비치 정권 하에 고위공직자로 지냈던 이는 10년간, 기타 관료는 5년간 정부 직위 종사하는 것을 제한한다. 정화 운동에 관한 법률에서는 2010년 2월 25일부터 2014년 2월 22일까지 1년 이상 정부 각료 지위에 있었던 이는 10년간 직위가 금지된다.

2015년 7월 11일까지 650명 이상의 공무원이 해고되었으며 9월 19일에는 760명이 해고되고 80명이 조사를 받았다. 2016년 7월 기준 총 923명이 해고되었다.

핵무기 정책

2014년 12월 13일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가 다시는 핵보유국이 되길 원치 않는다고 발표했다.

탈공산화와 올리가르히 해체

2015년 5월 15일, 포로셴코는 6개월 간 공산주의 관념 기념물을 철거하고 거리와 기타 공공장소, 마을 이름이 공산주의와 관련된 경우 이를 수정하도록 의무화한 탈공산화 법안에 서명하였다. 법안에 서명하며 포로셴코는 "난 해야 할 일을 했다"며 "우크라이나는 국가로서 해야 할 일을 했고, 정부는 미래를 책임지고 역사가들이 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포로셴코는 소련의 정치적 탄압과 홀로도모르를 1940년대 나치의 범죄와 동등하다고 말했다. 2015년 5월 15일 포로셴코가 서명한 법안에서는 로만타라스 슈헤비치와 스테판 반데라 등이 가담한 우크라이나 반역군(UPA)을 포함한 "20세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싸운 모든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포로셴코는 독일의 잡지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당선된다면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하고 다들 우려하는 로셴도 전부 매각할 것이다"라며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으로 나는 국가의 복지에만 집중할 것이고 그러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5년 3월 19일 최고 라다에서는 주식 회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하였다. 이 법안으로 소유권 유형에 관계없이 모든 주식회사의 대주주 비율은 2015년 기준 50% + 1주로 제한된다. 이 법안이 노린 주요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석유회사인 우크르나프타를 국영화시키는 일이었다. 우크르나프타의 지분 중 43%는 콜로모이스키 등이, 50% + 1주가 국가가 가지게 되었다. 2015년 3월 23일 포로셴코는 국영 석유회사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억만장자 올리가르히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가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주지사직을 사임 요청을 받아들었다.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에서는 더 이상 올리가르히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올리가르히가 중산층과 중소기업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시민들에게 "탈올리가르히(올리가르히 해체) 작업이 실현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와 맞서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3월 25일에는 합자회사에 관련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서명 당시 포로셴코는 우크르나프타 지분 관련하여 콜로모이스키의 사임에 대해 언급하며 본 법안이 탈올리가르히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7월 24일, 우크라이나 법무부는 탈공산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법 위반을 이유로 우크라이나 공산당(CPU)의 지방 선거, 총선, 대통령 선거 출마를 금지하였다. 같은 해 12월 17일에는 키예프 행정지방법원이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키예프 내 활동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2018년 12월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 국민주의자 기구(OUN)와 우크라이나 반역군의 무장부대원이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운 참전용사이자 전투원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재천명했다.

언어 정책

2016년 말 우크라이나의 라디오 방송국은 매일 우크라이나어 노래를 특정 시간 할당량만큼 송출해야 한다는 새로운 법률이 시행되었다. 동법에서 TV 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은 뉴스와 심층보도 같은 프로그램은 우크라이나어를 60% 이상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2017년 9월 15일 포로셴코 대통령은 2017년 9월 5일 최고 라다에서 통과된 새 교육법에 서명하였다. 서명한 교육법은 영어와 기타 유럽 연합의 공용어 중 하나로 두 개 이상의 언어로 가르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수준에서 동등하게 우크라이나어로 교육시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새 교육법은 3년간의 과도기를 거친 후 전면적으로 시행하도록 시간 규정이 있다. 2018년 2월 유예 기간이 2023년까지 연장되었다.

새로 통과된 교육법에 대해 유럽 평의회 입법 회의(PACE)는 "국가 내 소수민족 교육에 큰 장애"가 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헝가리, 루마니아, 러시아도 새 교육법을 비판하였다. (헝가리어와 루마니아어는 유럽 연합의 공용어이며, 러시아어는 아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새 교육법이 유럽 연합의 소수민족 권리에 관한 규범을 준수한다고 강조하였다.

새 교육법은 "우크라이나의 소수민족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공용어와 함께 각 민족의 언어로 취학 전 유치원과 초등학교 공공시설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한다"라고 되어 있다. PACE는 이 법안을 각 소수민족 대표와의 협의 없이 소수민족이 가지는 권리를 크게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8년 6월 27일 우크라이나의 외무부 장관 파울로 클림킨은 (2017년 9월의) 새 교육법을 베니스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사립학교엔 적용하지 않을 것이며, 소수민족이 공부하는 모든 공립학교에는 "우크라이나어나 소수민족의 모국어 둘 중 하나로 수업을 받을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9년 5월 19일에는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어의 공용어 기능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였다.

종교 정책

포로셴코 정권 하에서 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UOC-KP)와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UAOC)가 합병하여 독립 교회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수립되었고, 우크라이나 동방정교회 통합회의 내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UOC-MP) 의원 2명이 에피파니누스 1세를 초대 수좌주교로 선출하였다. 2018년 10월 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이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자치권을 부여해 주는 발표를 하며 결정적으로 10월 15일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이 세계총대주교청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였다.

군사 개혁

선거 운동 기간 포로셴코는 국방 부문을 개혁하고 군사를 NATO 표준으로 점진적으로 바꾸겠다고 공약하였다. 2014년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의 연정 협정에서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이 군사 개혁 부문이었다.

2015년 포로셴코는 "주지사의 주머니에서 나온 군대"인 우크라이나 국토방위대대를 우크라이나군 직속 부대로 통합하였다. 또한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군은 소련군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크라이나만의 전통을 가져야 한다"라며 준장급 계급을 호룬지(хорунжий)라는 계급으로 바꿨다. 포로셴코는 호룬지 계급이 우크라이나의 전통적 계급이자 NATO 표준 군사 계급에도 맞는다고 설명했다.

9월 2일에는 우크라이나 국가안보 및 국방위원회에서 우크라이나군 군사 교리 수정안을 발표하였다. 새 군사 교리에서는 러시아를 우크라이나의 주요 적국으로, 비동맹 정책을 포기하고 전략적으로 유로-대서양 방면과 화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9월 3일에는 포로셴코가 2020년까지 우크라이나군을 완전히 NATO 표준 체계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9월 20일에는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의 새 대전략에 관한 법령"에 서명하였다.

2016년 6월 6일 포로셴코는 국가안보 및 국방위원회의 결정 이행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다. 7월 26일에는 우크라이나군 특수작전부대 공식 창설 허가에 대한 법령에 서명하였다. 또한 2016년 새해부터 군인 급여를 3배 인상하였다. 9월 6일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군이 75% 감축하였다고 선언했으며 12월 15일에는 발령되었던 부분동원령을 해제하고 모병 군인만 전선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2016년 12월 31일 포로셴코는 2016년 한 해 동안 7만여명의 군인이 모병으로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포로셴코의 계획에 따르면 2020년까지 전군이 완전한 모병제로 전환되며 총 25만명을 모병할 예정이다.

2017년 3월 23일 포로셴코는 국가안보 및 국방위원회의 2020년 우크라이나군 발전계획령에 서명하였다. 미국의 고위급 전략보좌관인 존 애비시드는 우크라이나군의 군제개혁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며 빅토르 무젠코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과의 회의에서 "지난 2년간 우크라이나군의 대격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7년 7월 기준 28개 전부투대가 NATO 표준에 따른 훈련을 받았다.

2018년 9월 3일 포로셴코는 최고 라다에게 새로운 군사 경례인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슬라바 우크라이니), "영웅들에게 영광을!"(헤로얌 슬라바)를 정식으로 경례로 통합할 법안을 통과하라고 촉구하였다. 2018년 8월 24일 독립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에서 처음으로 공식 군사 경례인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 제창되었다.

부패 문제

포로셴코 재임 기간 프로조로 디지털 시스템 덕분에 부패율은 어느 정도 감소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부패는 널리 퍼진 중대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 포로셴코는 국제 통화 기금(IMF)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반부패 기구인 우크라이나 국립 반부패국 창설법에 서명하였다. 2015년 이후 반부패국은 총 189건의 사건을 기소하였지만 실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은 단 한건도 없다. 반부패국의 기소국장은 부패사범 피의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유죄 판결을 피할 수 있는지 지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11월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 보고서에서는 포로셴코의 집권 기간 우크라이나 내 의료, 연금, 공공행정 등 일부 개혁안을 칭찬하였다. 하지만 사법 개혁이 너무나 느리며 "현재까지 고위층의 부패 사범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라고 보고서에 기록되었다. 또한 시민 사회운동가를 향한 공격이나 테러도 거의 처벌되지 않는 상태라고 보았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포로셴코 자신은 아니지만, 포로셴코의 긴밀한 사업 파트너가 엄청나게 부풀러진 가격으로 러시아제 부품을 우크라이나 군수공장으로 밀수한 혐의로 고발되는 정치 스캔들이 일어났다.

포로셴코 비판 세력은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대신해 로비하고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캠프에서 활동한 폴 매너포트의 장부 외 현금수수 기록 혐의를 우크라이나 반부패국이 처벌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부패와 싸우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던 미헤일 사카슈빌리의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2019년 4월 11일 우크라이나 반부패 고등법원이 설립되면서 포로셴코는 개관식에서 정식으로 반부패 전문 법원의 판사를 임명하였다.

대외 정책

대미 정책

2015년 12월 7일, 포로셴코는 키이우에서 당시 미국의 부통령인 조 바이든과 만나 우크라이나와 미국 사이 협력 사항에 대해 논의하였다. 2017년에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와도 만났는데 이 때 BBC 뉴스는 회담을 열기 위해 포로셴코가 트럼프의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에게 40-60만 달러 어치의 금품을 제공했다는 허위 사실을 보도하였다. BBC 뉴스는 나중에 보도가 사실이 아니였음을 밝히고 기사를 삭제하였으며, 포로셴코에게 손해배상하였다.

대러 정책

2014년 6월, 포로셴코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중단하였다.

2014년 6월 24일 유럽 평의회 입법 회의에서 포로셴코는 러시아가 일방적인 크림반도의 합병 선언을 취소하고 크림반도를 다시 우크라이나한테 돌려줘야지만 러시아와의 양국 관게를 정상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4년 6월 포로셴코가 발표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평화 계획에 대해 러시아의 외무부 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최종적인 최후통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14년 8월 26일 포로셴코는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의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공세를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포로셴코는 러시아 내 분리주의자들에게 무기 공급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였다. 포로셴코는 자국이 정치적 타협을 원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어 사용자의 이익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연합과의 관계

유럽 연합과 우크라이나는 2014년 6월 27일 우크라이나-유럽 연합 제휴 협정의 경제 관련 문단에 서명하였다. 포로셴코는 이 날을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가장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하며 "깨지지 않는 의지와 믿음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포로셴코는 이날 한 서명이 우크라이나의 유럽 연합 가입을 위한 시작 준비 단계라고 말했다.

NATO 관계

2014년 11월 27일 열린 새 의회 개회 연설에서 포로셴코는 "2010년 주창한 우크라이나의 비동맹국 지위로는 우크라이나의 안보와 영토 보전을 보장할 수 없어 나토 가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2014년 12월 23일에는 최고 라다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이 제안한 2010년 우크라이나 비동맹국 법안 폐지 안건에 대해 찬성 303, 반대 8로 통과되었다.

2014년 12월 19일 포로셴코는 나토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2015년 9월 22일에는 "러시아의 공격적인 행동"이 NATO의 확대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으며, 국가 개혁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회원국 준수를 위한 모든 조건이 만족"된다면 그 즉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여부에 대한 찬반을 국민투표에 붙일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2월 2일에도 포로셴코는 독일의 잡지 풍케 메딩루페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는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타 국제사회

포로셴코는 국제 언론인과 블로거 41명을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1년간 우크라이나 입국을 금지하는 법령에 서명하였다가 언론인 보호 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입국금지명단에 들어간 언론인에는 BBC의 기자 3명과 현재 시리아에서 실종된 에스파냐인 기자 1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 이전에 우크라이나 위기를 취재하였다.

2015년 10월 포로셴코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를 방문해 당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게 카자흐스탄은 우크라이나의 "아시아로의 창"이며, 우크라이나는 그 역이라고 말했다. 2018년 10월에는 벨라루스의 호멜을 방문하여 우크라이나어 공동체에게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말하며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이용해 우리의 측면을 공격하길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2019년 대통령 선거에서

포로셴코의 지지율은 2014년 대통령 선거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016-2017년 경에는 지지율이 13-17%를 맴돌아 그보다 살짝 높은 지지율인 율리아 티모셴코에 이은 2위를 유지하였다. 2018년에는 지지율이 10% 미만으로 하락하였다가 2018년 말부터는 포로셴코의 지지율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자치에 관한 토모스(서한)이 반포되고 이를 정부 치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17-19%를 회복하였다. 대선 선거 운동 중반까지 포로셴코와 티모셴코의 지지율은 거의 동률이었다. 2019년 2월에서 3월 사이 여론조사에 따르면 포로셴코와 티모셴코의 지지율은 각각 15-17% 정도로 1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에 이어 거의 비슷할 정도로였고 티모셴코와 포로셴코의 지지율 차이는 오차 범위 이내였다.

2019년 1월 크루티 전투 101주년을 맞아 열린 "브뤼셀에서 크루티까지" 포럼에서 포로셴코는 "우리는 우리 길을 가야 한다"라며 2019년 대선에 재선 도전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포로셴코의 대선 캠프 본부장은 포로셴코의 내각 제1국위원장이자 국회의원, 2014년 대선 당시 포로셴코 대선캠프본부장이었던 비탈리 코발추크가 맡았다. 포로셴코는 재임 기간 자신의 업적, 즉 군대 재건과 유럽 연합과의 무비자 협정 체결, 종교 정책 등을 강조하였으며, 전시에서 포로셴코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공약으로는 농업, IT, 고부가가치 하이테크 산업(항공우주산업, 조선, 방위산업)의 개발과 우크라이나를 동유럽 교통 허브로 전환하고 관광업을 강화하는 방향을 강조하였다. 포로셴코의 선거 슬로건은 "군대, 언어, 신앙"이다.

2019년 3월 31일 열린 1차 대선에서 15.95%의 득표율로 30.24%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에 이은 2위로 결선 투표에 진출하였다. 4월 21일 열린 결선 투표에서 24.45%의 득표율에 그쳐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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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이후

2019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포로셴코는 유럽연대의 비례대표 1순위로 출마, 당선되었다.

경찰의 포로셴코 본부 및 체육관 기습

2019년 12월 20일 우크라이나의 경찰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명령에 따라 포로셴코의 당인 유럽연대 본부와 체육관을 기습하였다. 체육관에 설치된 연기 감지기와 보안경보장치 안에서 몰래카메라와 녹음장치가 발견되었다. 수사당국은 포로셴코가 소유한 체육관 고객을 몰래 녹화,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고객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내 여러 정치인과 사업가들도 있었다. 포로셴코와 당 부대표인 이호르 코노넨코는 경찰의 기습 사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유럽연대 당 측은 경찰의 기습이 정치적 탄압이라고 비판했다.

이번에 열린 압수수색은 두 가지 혐의에 대한 범죄 수사 과정에서 일어났다. 두 가지 혐의 중 하나는 국가 기밀 정보가 담긴 서버의 도난 혐의고, 두 번째는 탈세 및 돈세탁 혐의이다.

반올리가르히법

2021년 11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부유한 개인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내용의 반올리가르히법이 통과되자 포로셴코는 즉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방송국인 프리아미와 카날 5 채널을 매각하였다.

형사 기소

2021년 12월 20일,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에서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의 석탄을 구매하기 위해 친러시아 정치인 빅토르 메드베드추크와 함께 협력한 혐의로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최고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포로셴코는 이 의혹을 부인하면서 "젤렌스키의 정적을 겨냥해 조직된, 정치적 움직임의 흑색선전이다"라고 말했다. 2022년 1월 6일 우크라이나 법원은 포로셴코의 모든 자산을 압류하였다. 1월 15일에는 포로셴코가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1월 17일 오전 9시 10분 바르샤바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로 우크라이나로 입국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검찰은 포로셴코가 귀국하자 법원에 포로셴코를 2개월간 구금시키거나 10억 흐리브냐(약 3,7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전자발찌를 착용한 채 키이우에 남게 하고 여권을 압류할 것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법원은 가택연금보다 덜 까다롭고 보석금을 내지 않는 제3의 방안인 '개인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포로셴코는 법원이나 검찰의 허가 없이는 키이우나 키이우주 밖을 떠날 수 없으며, 정부에게 여권을 반납해야 하고 근무지나 거주지가 바뀌면 즉시 정부에게 신고해야 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2년 2월 25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창일 때 포로셴코는 키이우 시내 거리에서 민방위군과 함께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들고 TV에 출연하였다. 포로셴코는 방송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병사를 가지고 있든지, 얼마나 많은 미사일을 가지고 있든지, 얼마나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든지... 우리 우크라이나인은 위대한 유럽의 미래를 꿈꾸는 자유로운 민족이다. 확실히 그렇다"라고 말했다. 포로셴코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우크라이나 영토방위군 대대를 지휘하고 있다. 전투복 차림에 돌격소총을 소지한 채 유럽과 미국 언론과의 여러 인터뷰에 출현하기도 하였다.

파나마와 파라다이스 페이퍼

포로셴코는 패러다이스 페이퍼스에도 명단이 올라갔다. 돈바스에서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역외회사를 설립하였다. 파나마 페이퍼스에서 유출된 자료에 따르면 포로셴코는 2014년 8월 21일 프라임 에셋 파트너스 Ltd. 회사를 등록하였다. 이 회사는 키프로스에 있으며 회사의 유일한 주주는 포로셴코이다. 포로셴코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제과회사인 로셴의 판매를 감사하는 법률법인인 아벨룸은 포로셴코의 탈세혐의는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반부패 단체인 국제 투명성 기구는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기업을 세우는 행위는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라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제6대 대통령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정치적, 문화적 인상

포로셴코는 대형 제과업체인 로셴을 소유하고 있어 "초콜릿 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포로셴코는 "올리가르히는 스스로를 더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나라를 강탈하고 자유로운 사업을 파괴하는 도적들과 싸워왔다"라고 말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진행되자 포로셴코가 소유한 로셴의 유명 제품인 과자와 사탕을 구매해서 우크라이나를 돕자는 운동이 온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운동에 참여한 일부 네티즌은 포로셴코를 "애국노(애국과 매국노를 합친 말로 온라인상에서 포로셴코의 별명)"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별명은 포로셴코가 퇴임 후 막대한 규모의 부정부패가 드러나면서 해외로 망명했다가 나라를 지키러 돌아왔다는 사연이 알려지며 붙어졌다.

역대 선거 결과

각주

내용주
출처주

외부 링크

  • 위키미디어 공용에 페트로 포로셴코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우크라이나어)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공식 웹사이트

Text submitted to CC-BY-SA license. Source: 페트로 포로셴코 by Wikipedia (Historical)


신장 분쟁


신장 분쟁


신장 분쟁 중국어: 新疆冲突) 또는 위구르-중국 분쟁은 중국의 북서부 신장 자치구에서 진행중인 인종 분쟁이다. 지역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는 튀르크 소수 민족 집단인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다.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는 신장 위구르족의 독립 운동까지 포함하며, 이 경우에는 1931년 발발한 쿠물 반란부터 신장 분쟁으로 보기도 한다.

이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편입된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족의 대규모 이주, 중국 문화통합을 위한 정부 정책, 특정 위구르 정체성 표현 처벌, 분리주의에 대한 엄격한 처벌은 위구르인과 경찰, 한족 사이의 긴장에 기여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렌 타운십 폭동, 1997년 우루무치 버스 폭파, 굴자 시위, 2009년 6월 사오관 사건 및 그에 따른 2009년 7월 우루무치 소요 사태, 2011년 호탄 공격, 2014년 우루무치 역 폭탄 테러, 2014년 5월 우루무치 시 폭탄 테러, 2014년 쿤밍 기차역 학살 및 2015년 아커쑤 탄광 공격과 같은 테러 행위를 초래했다. 세계 위구르 회의와 같은 다른 위구르 조직은 전체주의, 종교적 편협성, 테러리즘을 정책적인 도구라고 비난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정부의 정책은 신장 재교육 캠프에서 백만명이 넘는 위구르인과 기타 무슬림 소수 민족 집단을 재판없이 감금하고 대량 감시하는 것이었다. 소수민족들이 감옥 내 노동에 동원되고, "노동을 통한 재교육" 프로그램(2013년 폐지된 것으로 추정)에 투입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국제 전문가들은 중국화 정책을 문화 학살의 사례로 분류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정부에 의해 부인되었고 유엔 인권 이사회 44차 회의에서 이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020년 이루어진 이 회의에서 39개국은 신장 위구르인들에 대한 중국의 행위를 비난했다. 같은 해 7월, 45개국으로 구성된 단체가 유엔 인권 위원회에 중국이 위구르인들과 신장 지역의 다른 무슬림들에 대한 행동을 옹호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배경

신장은 중화 인민 공화국 내의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많은 소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의 45%가 위구르인이고 40%가 한인이다. 산업화된 수도 우루무치의 인구는 230만명 이상으로, 그 중 약 75 %는 한족, 12.8 %는 위구르족, 10 %는 기타 민족 출신이다.

일반적으로, 위구르인들과 대부분의 한족 정부는 신장 지역에서 더 큰 역사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위구르인은 자신의 조상이 이 지역의 토착민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정부는 신장이 한나라 때인 기원전 200년 경부터 중국에 속했다고 간주한다. 중국 정책에 따르면 위구르인은 소수 민족으로 분류된다. 그들은 신장의 토착민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토지에 대한 특별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마오쩌둥 시대 에 중국은 이 지역을 경제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온 수백만명의 한족의 신장으로의 이주를 진행했다.

현재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은 적극적 우대조치로, 이는 한족과 구별되는 위구르족의 민족성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휴먼 라이트 워치는 이에 반박하며 중국이 저지른 "종교 활동 감시, 통제, 탄압의 다단계 시스템"을 주장한다. 현재 100,000명 이상의 위구르인이 "재교육 캠프"에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DJI에서 생산한 드론을 활용한 광범위 감시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이런 조치를 극단적인 분리주의 무장 단체들의 테러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써의 조치로 정당화한다. 이러한 정책은 한족과 위구르족 간의 오랜 편견과 더불어두 민족 사이에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정책의 결과, 위구르인들의 종교와 사회운동의 자유가 축소되었다. 위구르인의 대부분은 정부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경시한다 생각한다.

한편, 일부 한족 시민들은 위구르인들이 대학 입학 우대, (현재는 폐지된) 한 자녀 정책 면제와 같은 특별 대우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분리주의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에 적어도 직장 내에서는 위구르-한 관계가 비교적 우호적 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위구르 응답자의 70 %는 한족 친구가 있고 한족의 82 %는 위구르족 친구가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위구르 분리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신장 일부 지역에서 위구르 출생률을 제한하고 한족 출산율을 높이려는 시도가있었다.

제한

위구르인들은 종교적 권리가 없으며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에 반하는 행동인 돼지고기를 먹거나 강제 결혼, 음주 등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중국은 신장 지역과는 다르게 신장 지역이 아닌 곳의 비 위구르인의 어린이들이 모스크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은 분리주의 정서를 이유로 신장을 제외한 무슬림 지역에서 이슬람 사립 학교 (중국-아랍 학교 (中阿学校))의 설립을 허용했다.

위구르인들과 달리 국가에 고용된 후이족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 동안 단식을 할 수 있다. 하즈에 참가하는 후이족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후이족 여성은 베일을 착용할 수 있지만 위구르 여성은 베일의 착용이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지역에 따라 종교의 자유에 대해 차별적 대우를 하고 있다. 후이족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다. 그들은 종교를 실천하고, 모스크를 짓고, 자녀가 모스크에 가도록 할 수 있다. 반면 신장 위구르족들에게는 상당한 통제가 시행된다. 또한, 후이족 종교 학교가 허용되며, 모스크와 후이 수피 지도자가 운영하는 학교들이 정부의 승인을 받아 자율적으로 조직되었다. '디플로매트'에 따르면, 위구르의 종교 활동은 축소되었지만 후이족 무슬림은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를 부여 받았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위구르의 분리주의를 탄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투르판의 위구르 인은 종교와 관련하여 중국의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다. 반면 카슈가르와 호탄은 엄격한 정부 통제를 받았다. 투르판의 위구르와 한족 공산당원들은 위구르 어린이들에게 이 법을 거부하면서 이슬람 교육을 허용했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 공산당원들을 위해 종교행사와 하지를 장려했고 1979년부터 1989년까지 350개의 이슬람 사원이 투르판에 세워졌다. 그 결과, 투르판의 위구르인들은 한족, 후이족, 중국 정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89년 신장에는 20,000개의 사원이 있었다. 1996년 분리주의 소요가 있기 전까지 중국은 공식적으로 종교적 준수를 금지하는 규정을 따르지 않는 것을 허용했다.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우루무치에 대형 모스크가 지어졌고, 남부 신장에서는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었지만, 우루무치에선느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시행되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16년, 위구르 인들은 신장 내에서 이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검문소가 있는 울타리 내에서 생활했다. 남부 우루무치의 각 아파트 문에는 QR 코드 부착돼 있어 경찰이 주민들의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2017년 해외 위구르 운동가들은 라마단 기간 중 식사를 거부한 죄로 위구르인들에게 벌금이나 재교육 프로그램 적용, 메카 순례에서 돌아온 수백명의 위구르인의 억류, 무함마드 등과 같은 무슬림들의 표준적인 이름이 신생아에게 금지되는 등의 새로운 규제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 정부의 "짝짓기와 가족되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족 공무원이 억류된 위구르인의 집에 거주하도록 배정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구르인과 외부인을 위한 별도의 대기열이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위구르인은 많은 곳에서 신분증을 확인받아야 했다.

재교육 캠프

2017년부터 정치적 세뇌를 받고 강제 낙태, 강제 불임, 강간, 고문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재교육 캠프에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8년에는 이 숫자가 수십만으로 추정되었다.

이로 인해 인종 차별 철폐위원회, 미국 등 22개국 및 인권 단체가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50여 개국은 재교육 캠프가 정치적 재교육이 아닌 직업 훈련을 위한 인도적 대테러 조치라고 주장하며 인권 문제를 정치화하는 행위를 비판했다. 2020년 9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시진핑은 “새로운 시대의 신장 통치를 위한 당의 전략이 완벽히 옳고, 이것이 오랫동안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전체가 새로운 시대에 신장을 통치하는 당의 전략을 정치적 과제로 삼고 이를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타임 라인

20세기 이전

중국인과 민족주의 위구르인 역사가들 모두 이 지역에 대한 그들 각 단체의 관계를 과장하는 등 이 지역의 역사는 고도로 정치화되었다. 실제로, 신장 지역은 10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위구르를 포함한 여러 민족들의 고향이 되었다. 다양한 중국 왕조들이 때때로 현재 신장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해왔지만, 현재의 신장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는 청나라의 만주족이 주도한 서방 확장(몽골과 티베트를 합병했다)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초기 청나라의 통치는 "문화 다원주의적 접근"으로 특정된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의 신장 지역으로의 정착은 금지되었고, 지배를 받는 지역의 토착 관리들을 통한 간접 통치가 시행되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반란으로 인해 지방 인구에 부과되는 세금 부담이 증가하면서 후이족이 이끄는 무슬림 반란이 다수 발생했다. 후이족의 거주 지역은 후에 탈환되었고 1884년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청나라의 통치가 끝나 갈 때쯤, 청나라는 신장을 제국 국경의 다른 지역들과 함께 식민지화하려 했다. 이의 달성을 위해 청나라는 한족을 국경에 정착하게 하는 "정착형 식민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20세기

1928년 중화민국 시절 신장 동부의 반 자치구 쿠물 칸국 총독 양쩡신(Yang Zengxin)이 암살된 후, 그의 직위는 진수런(Jin Shuren, 金樹仁)이 이었다. 1930년, 쿠물 칸국의 막수드 샤가 죽자, 진수런은 칸의 지위를 완전히 폐지하고 군벌로서 이 지역을 장악했다. 부패와 토지의 유용(流用), 중국군에 의한 곡물과 가축 약탈은 1933년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수립한 쿠물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1934년,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소련의 도움을 받은 성스차이(Sheng Shicai, 盛世才)에 의해 정복되었다. 성스차이의 지도력은 소련의 영향력이 컸으며 1937년의 사례처럼 반란을 진압하는 데 소련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신장의 천연 자원을 공개적으로 제공했다. 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지만, "위구르"라는 용어가 일반 튀르크인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이 이 시기였다. 1942년 성스차이는 소련을 버리고 중화민국과의 화해를 꾀했다.

1944년 일리 반란은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소련이 개입했다는 정황적인 증거가 남아있고, 반란군은 주로 지역 주민의 지지를 받는 튀르크계 무슬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새로운 국가는 소련에 무역과 무기의 공급 등을 의존했으며, 국가의 "존립"에 대한 문제 또한 소련의 암묵적 동의를 받았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격파했을 때, 소련은 공산당 인민해방군의 탈환을 도왔다.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설립되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6만에서 20만명의 위구르인과 카자흐스탄인, 기타 다른 소수 민족들은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중국을 떠나 소련으로 도피했다. 중소 분쟁 심화됨에 따라 소련은 중국을 비판하는 대대적인 선전전을 벌였고, 소수 집단의 이주와 반란을 장려했으며, 분리주의를 주장해 중국의 주권을 훼손하려 시도했다. 1962년 소련 영사관이 중국 탈출을 위한 여권을 배포했으며, 이에 중국은 소련 시민에 대한 출국 허가증 발급을 중단했다여권을 배포했기 때문에 소련 시민에 대한 출국 허가 발급을 중단했다. 그 결과 이닝시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해 인민해방군은 사격을 가했고, 이는 추가적인 시위의 발생과 집단 탈출을 촉발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중국은 비한족 인구를 국경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켜 완충지대를 만들었고, 후에 이곳은 한족 농민들과 신장 생산 건설 병단으로 채워졌다. 카자흐스탄에 기반을 둔 소수 민족 게릴라 단체들이 자주 중국 국경 초소를 습격하고 1969년 중국과 소련이 국경에서 충돌하면서 10년 내내 긴장이 고조되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가 주도한 신장으로의 대규모 이주는 한족의 수를 인구의 7%에서 40%로 증가시켜 민족적 긴장을 악화시켰다. 한편, 영아 사망률 감소, 의료 서비스 개선, 한 자녀 정책의 느슨함은 신장 지역의 위구르 인구가 1960년대 400만명에서 2001년 800만명으로 증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68년 동튀르크스탄 민족 혁명당은 위구르 분리주의 단체의 최대 무장조직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에 소련은 동투르퀴스탄 혁명전선을 지원하여 중국과 싸웠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한 이후 중국의 신장에 대한 중요성은 높아졌고, 이것은 중국은 소련에 포위되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지원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지원했고, 소련 무슬림 소수민족들이 중국의 소수민족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소련의 방송에 맞서 아프가니스탄 무슬림이 위구르인들에게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해 보도했다. 반소련 성향의 중국 라디오 방송은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했다. 중국 당국은 신장에 있는 한족 이주민들이 소련을 방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중국은 카슈가르와 호탄 부근에 아프간 무자헤딘을 훈련하기 위한 캠프를 설립하여 소형 무기, 로켓, 지뢰, 대전차 무기에 수억 달러를 투자했다. 1980년대 학생 시위와 경찰의 행동에 대한 폭동은 민족적 양상을 띠었고, 1990년 4월 바렌 타운십 폭동이 전환점으로 인식되었다.

소련은 위구르 민족주의 선전과 중국에 대한 위구르 분리주의 운동을 지지했다. 소련 역사가들은 위구르의 고향 땅이 신장이라고 주장했다. 위구르 민족주의는 터키주의에 관한 소련식 역사에 의해 촉진되었다. 여기에는 신장이 중국의 주도로 동튀르키스탄과 중가리아와 같은 지역을 합쳐 만들었다는 주장이 포함된다. 벨러르 한은 소련-위구르 역사가들이 역사 내내 위구르인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강조하며 중국을 상대로 이념 전쟁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소련 공산당은 반중국 선전전에서 동투르퀴스탄 제2공화국과 일리의 난을 미화한 작품들의 출판을 지지했다.

1990년대 ~ 2007년

199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스트라이크 하드 (Strike Hard)"캠페인은 수천 건의 체포와 처형, 지속적인 인권 침해를 보였으며 종교의 자유도 현저하게 감소시켰다. 이러한 정책과 정치적 소외감은 경찰서에 대한 파괴와 공격을 포함한 수많은 게릴라 작전을 수행 한 단체들의 발효에 기여했으며, 이들 단체는 폭탄 공격이나 공무원 암살과 같은 테러 행위도 저질렀다.

1992년 2월 이슬람 개혁당 소속 충격부대의 우루무치 버스 폭탄 테러로 3명이 사망했다.

경찰이 라마단 기간동안 분리주의자로 의심되는 30명을 체포하고 처형한 것은 1997년 2월에 대규모 시위를 야기했으며, 이것은 중국 언론에서는 폭동으로, 서방 언론에서는 평화 시위로 보도되었다. 시위는 2월 5일 굴자 사건에서 절정에 달했다. 인민해방군의 진압으로 최소 9명에서 최대 1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월 25일 우루무치 버스 폭탄 테러에서 9명이 사망했고 68명이 부상당했다. 위구르 망명 단체들은 이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했다.

1997년 3월 7일 베이징 시단 구에서 버스 폭탄으로 2명이 사망했다.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은 이번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묵살했으며, 터키에 기반을 둔 동투르퀴스탄 자유기구(Organization for East Turkistan Freedom)는 공격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였다. 버스 폭탄 테러는 중국이 분리주의에 의한 공격을 인정하게 하고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촉발했다. 신장의 상황은 2006년 중반까지 조용해졌지만 인종 간 긴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2007- 현재

본 윈터바텀(Vaughan Winterbottom)에 따르면 튀르키스탄 이슬람당(Turkistan Islamic Party, TIP)이 선전 비디오와 아랍어로 된 튀르키스탄 이슬람 잡지를 배포하지만, 중국 정부는 해당 당의 존재를 부인했다. 중국은 TIP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그들은 2008년 버스 폭탄 테러의 책임이 없으며, 그와 연관성도 없다고 주장했다. 2007년 경찰은 TIP 테러리스트 훈련소를 급습했다. 이듬해, 중국남방항공 여객기에 대한 자살 폭탄 시도는 좌절되었고 카슈가르 공격으로 베이징 올림픽이 시작되기 4일 전에 16명의 경찰관이 사망했다.

2009년 6월 25-26일 밤, 광둥성 샤오관 사건으로 2명이 사망하고 1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2009년 7월 우루무치 소요 사태를 촉발시켰다. 그 외에도 2009년 9월 신장 소요 사태와 2010년 아커쑤 폭탄 테러로 376명이 재판을 받았다. 2011년 7월 호탄 공격으로 18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14명이 테러리스트였다. 테러리스트는 위구르인이었지만 한족과 위구르인 모두 피해자가 되었다. 그해 6명의 위구르족 남성이 우루무치로 향하는 항공기를 납치하려했지만 실패했고, 7월에 일련의 칼과 폭탄 테러가, 12월에는 피산 인질극이 벌어졌다. TIP는 일련의 테러에 대해 자신들의 소행이라 공언했다.

2012년 2월 28일 예청에서 발생한 공격으로 20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 입었다. 칼을 휘두르는 위구르족 테러르시트 집단이 주로 이슬람교도 위구르인들이 거주하는 중국 북서부 신장 지역의 시장을 공격해 최소 20명이 사망했다. 경찰이 그들 중 7명을 총으로 제압하기 전에 13명이 그들에 의해 사망했다. 2013년 4월 24일, 카슈가르시 인근의 바추에서 무장단체와 사회복지사, 경찰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폭력 사태로 경찰과 공무원 15명을 포함해 최소 21명이 사망했다. 지방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충돌은 흉기로 무장한 수상한 남자들이 카슈가르 외곽의 한 주택에 숨어 있다는 다른 공무원의 보고가 있은 후 발생했다. 두 달 후, 6월 26일, 27명이 산산에서의 폭동으로 17명이 사망했으며, 10명은 루쿤 마을에서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10월 28일, 베이징 중심부의 천안문 광장 근처에서 4륜 구동 차량이 돌다리에 충돌해 화재가 발생하고 5명이 사망,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중국 당국은 운전자가 위구르인인 것으로 확인했다.

2014년에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지난 1월, 반 중국 위구르 단체로 알려진 11명의 조직원들이 키르기스 검문에서 처형당했다. 그들은 위구르인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소지품들로 그들이 분리주의자임을 확인했다.

3월 1일, 칼을 휘두르는 테러리스트들이 쿤밍 기차역을 공격하여 31명이 사망하고 141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국은 이 테러의 배후로 신장의 무장 세력을 지목했으며, 뒤이은 단속에서 380명 이상을 체포했다. 체포 된 테러리스트 1명과 용의자 3명은 6월 30일 기소되었다. 용의자 중 3명은 이틀 전 체포 된 이후 테러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테러 집단의 조직과 고의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9월 12일, 중국 법원은 공격으로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중국 TV의 보도 부족으로 소셜 미디어가 이러한 테러들을 보도하는 주요 채널이 되었고, TIP는 이를 칭찬했다.

4월 18일, 위구르족으로 확인된 16명의 중국인 단체가 베트남 국경 수비대에 의해 중국으로 송환될 때 총을 빼앗은 후 총격전을 펼쳤다. 4월 18일, 위구르족으로 확인 된 16명의 중국인 그룹이 베트남 국경 수비대 가 중국으로 송환 될 때 총을 압수한 후 총격전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5명의 위구르인과 2명의 베트남 군인이 사망했다. 위구르인 중 10명은 남성이었고 나머지는 여성과 어린이였다.

12일 후 두명의 공격자가 2014년 우루무치 역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 테러리스트를 포함해 3명이 사망했다.

5월 22일, 우루무치의 거주자들이 우루무치 시장에서 2014년 5월 우루무치 시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 이 공격으로 43명이 사망하고 9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는 신장 분쟁 이래 최대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6월 5일 중국은 신장에서 테러 행위를 한 혐의로 9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신화 통신에 따르면 7월 28일, 37명의 시민이 사처현의 엘리쓰쿠(Elixku)와 후안디(Huangdi)에서 칼과 도끼로 무장한 갱단에 의해 사망했고 59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보안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21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한 후 체포되었다. 또한 신화 통신은 30대의 경찰차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수십명의 위구르인과 한족 민간인이 사망 또는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위구르-미국 협회(Uyghur American Association, UAA)은 현지 위구르 인들이 공격 당시 이에 대해 항의했다고 주장했다. 이틀 후 카슈가르에서 중국 최대 이슬람 사원의 온건파 이맘이 아침 기도 후 암살당했다.

9월 21일 신화 통신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시의 남서쪽 룬타이현에서 일련의 폭탄 폭발로 5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망자는 민간인 6명, 경찰관 4명, 폭도 44명이었다.

10월 12일, 칼과 폭발물로 무장한 4명의 위구르인이 신장의 농산물 시장을 공격했다. 경찰에 따르면 경찰관과 테러리스트를 포함해 22명이 사망했다.

11월 29일, 야르칸드현에서 15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 11명은 위구르 무장 세력이었다.

2015년 9월 18일 아커쑤에서 칼을 휘두르는 테러리스트 그룹이 석탄 광산에서 잠자는 노동자를 공격해 50명을 살해했다. 튀르키스탄 이슬람당은 공격에 대해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했다. 11월 18일, 56일 간의 중국 보안군에 의한 테러리스트 수색으로 그들을 산의 은신처로 몰아넣었다. 28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사살되었고 유일한 생존자는 당국에 항복하였다.

2015년 방콕 폭탄 테러는 태국이 100명의 위구르인 망명 신청자들을 중국으로 추방한 것에 대응하여 회색 늑대들(Gray Wolves)로 알려진 터키의 극단적 민족주의 조직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폭탄 테러와 폭탄 제작 관련 혐의로 태국 경찰에 체포된 터키 남성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아파트에서 폭탄 재료가 발견되었다. 테러 위험과 여권 위조로 인해 태국의 위구르인들은 프라윗 웡 수완 국방 장관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여담으로 두명의 터키계 위구르인이 입국한 뒤 태국 경찰은 비상사태가 되었다.

2016년 8월 30일, 키르기스스탄 뉴스는 키르기스스탄 중국대사관이 위그르족의 자살폭탄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자살 폭탄 테러범은 테러로 인한 유일한 사망자였다. 사상자의 계산에는 키르기스스탄인들은 포함되었지만, 중국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이 일의 배후로 시리아에 본부를 둔 누스라를 지목했다.

경찰은 2016년 12월 28일 호탄현의 카라칵스(Karakax)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무장 세력 4명을 살해했다.

2017년 2월 14일, 칼을 쥔 3명의 테러리스트가 경찰에 의해 제압되기 전에 살해되었다.

2013-2017년 동안 신장 지역에서 발생한 체포 건수는 330,918 건으로 중국 전체 체포 건수의 7.3%를 차지했다. 이는 이 기간 전 5년간 81,443명이 체포된 것과 비교된다. 2019년 3월 중국 정부는 2014년 이후 신장에서 13,000명 이상의 무장 세력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여파

2017년부터 중국 정부는 100만 명 이상의 무슬림(대부분 위구르인)이 별도의 법적 절차 없이 수용소에 수용되는 것이 가능케 하는 정책을 시행해 왔다(이는 홀로 코스트 이후 최대 규모이다). 이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들은 신장을 중국화하려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것을 민족말살 또는 문화말살로 불렀다. 많은 운동가들과 NGO, 인권 전문가,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행위에 대해 그것을 집단학살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재교육 캠프에 위구르인의 수용, 위구르인들의 종교적 관습 탄압, 정치적 세뇌, 학대, 강제 살균과 강제 불임과 피임을 포함한 인권 유린을 강조했다. 중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주로 위구르 지역의 호탄과 카슈가르의 출생률이 60%이상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전국의 출생률은 1,000명 당 12.07명에서 10.9명으로 9.69 % 감소했다. 중국 당국은 2018년 신장에서 출생률이 거의 1/3까지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강제 불임 및 집단학살에 대한 혐의는 부인했다. 신장의 출산율은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2%에 불과한 반면 2019년에만 거의 24% 하락했다.

2021년 전 신장 법무부 장관 쉬르자트 바우둔(Shirzat Bawudun)과 전 신장 교육부 장관 사타르 사우트(Sattar Sawut)는 테러와 극단주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외에 3명의 교육자와 교과서 편집자에게 낮은 형량의 선고가 내려졌다.

테러 단체

튀르키스탄 이슬람당(TIP)은 동튀르키스탄에서 중국을 추방하려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이다. 2007년에 등장한 이래 다수의 테러 공격에 대한 소행을 주장해 왔으며 중국 정부는 이 단체가 200건 이상의 테러로 162명의 사망자와 44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낳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수백명의 위구르인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리아 내전과 같은 분쟁에서 극단주의 단체와 함께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튀르키스탄 이슬람당의 정확한 규모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부 전문가들은 이 집단이 중국에서의 공격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결속력 있는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TIP는 2003년 지도자 하산 마흐숨이 사망한 이후 사실상 사라진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 두개의 이름은 종종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중국은 주로 ETIM을 사용하며, 이 둘 사이의 연결성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알 카에다와의 연결

TIP는 알 카에다와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 파키스탄 탈레반과 같은 단체들과 관련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립 B. K. 포터(Philip B. K. Potter)는 "1990년대 내내 중국 당국은 신장에서 활동하는 조직들, 특히 ETIM을 알 카에다와 공개적으로 연관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증거들이 2001년 이전에는 이 관계가 약간의 훈련과 자금 지원은 있었지만, 운영상의 협력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편, 중국 당국은 TIP에 의한 특정 사건을 단독 범죄 행위로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1998년 TIP는 본부를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옮겼다. 한편 포터는 "신장에서 진행중인 중국의 치안 단속은 가장 호전적인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을 파키스탄과 같은 인접국가로 몰아 넣었다"고 말한다. 또한 "그곳에서 그들은 전략적인 동맹을 맺고 있으며 심지어 알 카에다와 탈레반과 연결된 지하드주의 파벌을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운동은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명칭에서 "동부"를 삭제했다. 미 국무부는 2002년부터 이 단체를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등록했으며 알 카에다로부터 훈련 및 재정 지원을 받은 것으로 표시했다. 2020년 10월에 이 지정이 해제되었다.

많은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TIP, 신장의 독립과 중국에 대항하는 지하드에 대한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알 카에다와 연계된 알 파지르 미디어 센터는 TIP 홍보물을 배포했다.

제임스타운 재단(Jamestown Foundation)의 앤드류 맥그리거(Andrew McGregor)는 "위구르 무장단체들이 북부동맹에 대항해 탈레반의 수장들과 함께 싸운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빈 라덴이 2002년 테러리스트들을 중국에 보냈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속조치 없이 주의를 모으기 위한 위협들(올림픽 공격이나 생화학 무기의 사용 등을 포함)과 같은 TIP의 전략은 중국 당국이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을 테러범으로 규정하려는 선전에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말한다.

반응

2018년 10월과 2019년 12월 중국 관영 언론은 신장 분쟁과 재교육 캠프의 필요성에 대한 다큐멘터리 2편을 방영했으며, 이것은 중국 소셜 미디어에서 엇갈린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운동

동튀르키스탄 이슬람 운동은 유엔,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 영국,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터키, 및 아랍 에미리트 연합에 의해 테러집단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제재를 받았다.

국제 연합

2019년 7월 제41차 유엔인권이사회(UNHRC) 총회에서 22개국이 중국의 위구르인 등 소수민족 집단학살을 규탄하는 공동서한을 발표하면서 "위구르인 등 무슬림과 소수민족의 이동 자유 제한과 동의 없는 구금을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같은 회의에서 50개국은 중국의 신장 정책을 지지하는 공동 서한을 발표하며 인권 문제를 정치화하는 관행을 비판했다. 서한을 통해 "중국은 신장에 외교관 국제기구 관계자, 언론인을 다수 초청했다"며, "신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밝혔다.

2019년 10월 23개국은 유엔에서 "중국이 인권 존중에 대한 국내 및 국제적 의무와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응하여 54개국이 중국의 신장 정책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신장에서의 대테러와 탈 급진적 조치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봤으며 "이러한 조치가 모든 인종 집단의 기본 인권을 효과적으로 보호했다"고 말했다.

위구르 인권 정책 법

미국 상원과 하원은 신장 분쟁에 대응하여 2019년 9월과 2019년 12월에 위구르 인권 정책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마그니츠키 법(Magnitsky Act)에 따라 신장 공산당 서기 천취안궈(Chen Quanguo, 陈全国)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의무적 제제를 포함한다. CCP 정치국 구성원에 대한 제재는 이 제재가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6월 17일에 법안에 서명했다.

위구르인의 추방

동남아시아를 통해 중국을 탈출한 수백명의 위구르 인들이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의 정부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 유엔 난민 기구, 인권 단체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미 국무부는 추방된 위구르 인들이 "가혹한 대우와 적법한 절차를 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 반면, UNHCR과 휴먼 라이츠 워치는 추방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외국 기업의 참여

이 지역에 코카콜라, 폭스바겐, 지멘스와 같은 서구 기업이 진출해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 기업들의 존재가 인권 침해에 자금을 대고 기술 협력을 통해 소수 민족을 감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신장 섬유 산업에 강제 노동이 만연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세계 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는 신장에 대한 관여를 재고하기 시작했으며 아디다스나 뱃저 스포츠웨어를 포함한 섬유 제조업체는 신장에서 철수했으며 또한 일부 기업은 신장의 인권 침해에 연루된 중국 기관에 대한 기술의 이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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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부

위구르족과 중국 사이의 갈등이 증가함에 따라 분쟁은 중국 국경 너머에서도 발생했다.

시리아 내전 중에 중국인 인질이 이슬람 국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ISIS는 신장 문제로 중국과의 싸움을 주장했다.또한 이 무장 세력은 시리아(특히 이들리브)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시리아 내전에서 가장 급진적인 전투 단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어 중국의 신중한 반응을 초래했다.

ISIS에 의해 다수의 위구르 무장 세력이 모집되어 동남아시아에 진출했으며 일부는 인도네시아 무자히딘에 합류했다.

관련 자료

  • 진행 중인 군사 분쟁 목록
  • 위구르족
  • 위구르족 집단학살
  • 신장의 이슬람화와 터키화
  • 중국의 이슬람 공포증
  • 범 이슬람주의와 범튀르크주의
  • 신장 독립운동
  • 세 가지 악
  • 중국의 테러
  • 폭력적인 테러리즘에 맞서 스트라이크 하드 캠페인
  • 신장 재교육 캠프
  • 한족 쇼비니즘

같이 보기

  • 진행 중인 군사 분쟁 목록
  • 범이슬람주의

각주

참조

인용

출처

추가 자료

외부 링크

  •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신장 문서화 프로젝트
  • 신장의 위구르족-신장 분쟁의 배경에 대한 자세한 역사

Text submitted to CC-BY-SA license. Source: 신장 분쟁 by Wikipedia (Histor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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